brunch

<짱구 극장판 : 초능력 대결전 ~날아라 수제김밥~>

나는 그대로라서, 훌쩍 커버린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위로.

by 후기록

<신차원! 짱구는 못 말려 더무비. 초능력 대결전 ~날아라 수제김밥~>


짱구라는 ip가 나온 지가 벌써 35주년을 앞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니메이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8~9살 남짓부터 봤다는 전제하에 처음의 짱구의 독자는 벌써 40대가 되어 삶과 인생을 책임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현재까지 새로운 에피소드가 방영 중이니 지금의 어린이에게도 짱구의 영향력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까지도 닿아있네요.

시대의 요구와, 생활의 변화, 기술의 발전 등등으로 그 향유 세대는 모두 ‘같은 짱구’를 경험한 건 아니겠지만,

여전히 유쾌하고 귀여운 ‘짱구’가 가지는 문화의 생명력은 여전한 듯합니다. 생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신차원 짱구는 그런 여러 세대로 분포되어 있는 짱구 팬들 중 ‘올드 팬’들을 겨냥한 느낌이 조금 들었습니다.

영화 오프닝의 검열된 눈가리개가 원래는 봉미선의 브래지어였던걸 생각해 보면 시작부터 꽤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듯해요.

약간의 ‘화장실 개그’와 ‘마이페이스’의 짱구. 여자를 밝히다 못해 신체적으로 접촉을 서슴없이 하는 짱구의 모습까지 그 뒤로도 여자의 몸을 밝히는 신형만과.

단란주점의 명함을 들이밀며 질책하는 봉미선. 아이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불편하면서도 웃픈 개그들.

현재에 들어선 검열이 되어버려서, 요즘의 아이들에겐 보여주긴 좀 남사스럽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고.

아 ‘옛날 짱구’네요. 여전히 5살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같이 먹어버린. 어쩌면 낡은 개그고, 그 내용과는 별개로 꽤 반가운 기분도 들더랍니다.


‘음지남’과 ‘짱구’의 대결구도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깨닫는 부분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짱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기한 타깃 독자의 나이대와 비슷한, ‘음지남’의 서사가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어요.

아야기의 초반부의 불쾌한 이벤트와, 이야기 후반부의 어두운 조명 밑의 기억들은 여태까지의 짱구 극장판이 보여준 것과는 궤가 좀 다를 정도로

‘유난스럽게 어둡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많습니다. ‘삶’이란 게 어느 누군가에겐 친절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뼈 저리게 깨달은 대충 저 정도의 나이대의 분들에겐

짱구에게 기대한 영상이, 이런 어두운 이미지 일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 같아요. 짱구 극장판은 언제나 ‘판타지’의 영역에서 ‘모험’의 서사를 담아냈었으니.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현실 쪽에 한 컵정도 더 부어놓은 이번 극장판의 기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선, 확실히 어느 정도 치이고, 때도 묻고, 포기도 해본 사람 이어야겠다.

그런 어른 이어야겠다. 아니 어른이면서 아직도 ‘짱구’가 필요한 그런 어중간한 사람 이어야겠다.라는 생각을 조금 해봅니다.


 ‘음지남’은 과연 괴물이 되길 선택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번 극장판의 이야기를 현실의 이야기로 치환하면, 정말. 아니 , <정말>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될 서사니 까요.

그래서 이런 위로를 건네주는 게 과연 옳을까라고 생각해 보다가, 어쩌면 이 영화는 아직 ‘짱구’를 찾아오는 ‘동심의 마지노선’에 걸친 ‘청년층’을 위로하고

어쩌면 구원하려는 마음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닿았습니다. 혼자가 되는 일은 무섭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게 잔인한 일이죠.

세상의 우울은 언제나 우리를 끊임없이 압박합니다. 새로운 소식은 놀라울 것도 없이 ‘네거티브’가 아마 2-3배는 더 잘 팔리니, 조명을 독차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요.

이런 세상에 꿈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유치하고’, ’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으로 곧잘 치부되곤 합니다. 심지어 그 꿈을 빼앗고 정하기 편한 목표주체인 ‘돈’이란 존재는 여전히 굳건히 서있습니다.

돈도 없고, 친구를 사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떠내려온 것 같고, 삶은 여전히 불친절하며, 나는 아무것도 적응한 것도 없는데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라고 내던져 놓은 주변.

그런 청년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삶을 꿈꿀 수 있을까요? 사실 저도 당사자이다 보니, 선뜻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역시 ‘버티는 게’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을,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하니까요.


오래된 ip라서 전달해 줄 수 있는 ‘언제나 함께였다’는 말. ‘음지남’의 과거에서 어린 그를 도와주는 짱구. 왜 선연한 메타포입니다.

과거의 어린 음지남과 성인이 된 현재의 그. 둘 다 ‘변하지 않은 5살의 짱구’를 겪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오랜 ip가 가지는 힘은 아주 강합니다. 문화 전체적으로 생각해 봐도, 한 사람의 개인에 주는 영향력을 생각해 봐도 말입니다. 그 뒤의 ‘신형만’의 삶의 관록이 붙은 삶에 대한 조언까지 얹어.

청년들의 처진 어깨를, 굽은 무릎을 툭툭 털어주는 위로.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그 내용이 와닿지 않더라도, 강한 힘을 가집니다. 그래서 참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해요.


물론 한계들은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과거의 개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그걸 이해하는 사람들끼리의 농담이다 보니, 그에 소외된 사람들에겐 불편감을 줄 거라는 생각을 조금 합니다.

특정 타깃을 목표로 한 이야기 역시도 ‘짱구’가 ‘어린이’ 만화로 변화하기로 한 선택이 있었으니, 그에 따른 책임도 분명 지었어야 할 것 이겠죠.

이런 이야기였을 거면 관람등급을 높이고 검열을 좀 줄이지. 싶은 생각도 들고요.


다만, 전 이런 위로가 싫지 않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5세 이전에는 변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물론 성격형성은 전혀 다른 문제긴 하지만, 아직은 어린, 굳어지지 않는 부분들은 다시 ‘성형’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짱구 극장판’을 스스로 찾아볼 ‘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 희망을 가지고 싶어요.

모든 생각은 같은 속도로 자라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어리게 간직하고 있는 어떤 부분들이 어쩌면 또 새로운 내가 될 가능성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콘크리트 유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