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에 새겨지는 은밀한 폭력.
소녀. 7번의 자상. 구급대가 도착했음에도 과다 출혈로 사망. 몇 가지 요소들만 파악해도 상당한 폭력이 예상되는 범죄에 체포된 용의자는 겨우 13살의 소년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은 이렇게 시작된다. 겨우 4화라는 짧은 시리즈 내에 이 한 소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아주 집요할 정도의 ‘원테이크’ 시선으로 조망하는 이 작품은 여러모로 아주 고통스럽다. 특히 인스타그램을 필두로, 인터넷 세상이 이젠 하나의 현실이 된 요즘 청소년의 삶과 사고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집요하게 던진다.
작중에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소재는 사실 살인도 아니고, 범죄도 아니며, 무엇보다 ‘인스타그램’을 필두로 한 인터넷 세상. 더 좁게 보자면, SNS의 영향력이다. 포스트를 올리지도 않으면서 다른 또래들의 일상을 관찰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가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요즘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친해 보이는 이모지 메시지들이 사실은, 한 아이를 사이버 불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세계에서, 이젠 인터넷이라는 곳이 단순히 ‘가상 세계’를 넘어 ‘현실’이라는 지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소위 말하는 인플루언서라는 직종들이 있다. (사실 아직도 나는 이것을 ‘직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그들은 ‘영향을 줌’으로서 돈을 벌고 있기에, 그 수익을 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프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직업의 영역에 느슨히 포함해 본다.) 이 인플루언서라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보는 대부분은 결국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어떤 주장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강하게 한다는 공통점을 본다. 작중에서 넌지시 언급된 ‘앤드류 테이트’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런 인플루언서의 말은 아주 짧고 강렬하다. 레드필, 20/80, 그리고 인셀. (여기선 작중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성별 혐오적 언어만 기재했지만, 그 외에도 소위 ‘밈’으로서 소비되는 혐오 표현은 차고 넘치게 많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여기서, 이제 없으면 이상해져 버린 스마트폰, 그 손바닥만 한 화면 내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폭력’을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어떤 방어막도 없이 그런 것에 노출되는 아이들의 모습조차, 새벽에 불을 켠 채로 ‘다른 세상’에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무슨 일을 겪는지 몰라, 그저 ‘그 작은 방에서 무슨 짓을 하겠어’하고 그저 안심한 채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 답게 시간을 보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은밀한 폭력’은 이제 부모, 아니 가족, 아니 공동체, 아니 마을, 아니 도시까지. 그 어떤 현실의 영향력보다 더 밀접하게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소위 ‘유독하고 왜곡된’ 사상은 놀랍도록 자극적이고, 그렇기에 쉽게 중독된다. 세상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기꾼들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너무 쉽게 갈라서, 다른 쪽을 ‘정복할 것’,’ 수치를 줘야 할 것’,’ 부숴버릴 것’이라고 명명해 버리는 이 행태는, 우리의 미래가 될 자녀 세대들을 그들이 서로 ‘마주하기도 전’에 그들의 세계를 반으로 쪼개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두 번, 세 번 쪼개지다 보면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결국 ‘나’와 ‘그 외 나머지’뿐인 세계가 아이들에게 형성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놀랍도록 안락한 지옥이 되어 버린다. 2025년에 들어 <소년의 시간>이 다루는 이 행태에 대한 비판이 실은 2011년의 <디태치먼트>에서 ‘마케팅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노력을 생각하면 이 14년의 간극에서,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썩어버렸고, 이젠 되돌아갈 지점마저 잊어버린 듯하다.
작중의 제이미는 결국 적어도 지금의 생각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할 아이였을 것이다. 역사를 좋아하고, 꽤 성적이 좋은 ‘똑똑한’ 아이. 하지만 그 아이에게 ‘현명’ 함을 알려줄 ‘학교’는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스마트’함을 필두로 이미 교육 현장에서 ‘선생’이라는 인간의 가치는 무색해졌다.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서 무언갈 배우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인터넷에서 ‘폭력’을 배우고, 학교는 ‘또래가 모여 학습된 폭력을 실행하는’ 사실상 범죄의 재학습 역할을 하는 관리되지 못하는 교도소의 역할을 자행한다.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 이 아이는 3화에서 놀랍도록 유창하게 어디선가 들어본 ‘여성 혐오적’ 표현들이 일종의 진실인 양 이야기한다. 거기에 더해 심화해 체화하여 ‘그 아이가 나약해져 있기에, 쉽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다.’라는 말을 꺼낸다. 무서운 큰 체구의 남성들에겐 고분고분 하지만, 심리 분석가인 여성에겐 겁을 주고, 수치를 주며, 최후에는 ‘자기를 좋아하지 않냐?’며 사랑을 갈구한다. 이 ‘인셀’ 적 사고를 과연 이 아이가 스스로 체득했을까?, 우습게도 이런 질문 자체가 멍청하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으니까.
다시 한번 인플루언서를 소환해 본다. 이 범죄를 벌인 소년은 극을 이끌어 가는 내내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하는 지점을 상기시켰을 때, 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정말 죄가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 인플루언서라는 직종의 가장 큰 맹점은, 본인의 ‘사상’을 다른 이에게 주입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비난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그 대상이 되기엔 그 연결점이 너무 희미하다. 특히나 비슷한 사상을 여러 명이 말하는, 아니 수천, 수만, 수십만이 각자의 대자보를 인터넷이란 게시판에 걸어 놓는 이 시대에서, 이러한 범죄가 일어남에 생기는 책임을 희석한다. 아니 오히려, 이 아이가 어떤 폭력에 노출되었는지조차 몰랐을 ‘성실하고’ ‘좋은’ 가족들이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 이 부조리의 연쇄는 더 이상 이해가 불가한 영역이다. 안타깝게도.
(오해하지 마시라. 영향을 받은 아이의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임을 그 아이와 그 가족만이 ‘연좌’해서 감내해야 하는 일인가?라는 의문일 뿐이다)
세상이 드디어 ‘인스타그램’의 유독성을 파악하고 제재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단지 인스타그램의 문제일까. 인스타가 아니라면 또 다른 대체재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도 사실 ‘인스타그램’마저 일종의 개량된 대체재였던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혐오’의 논리는 인류의 역사만큼 길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변할 것이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쪽으로, 자신을 찾기도 전에 어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이 그대로 미래를 견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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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인스타그램을 끊어냈다. 이 글도 인스타그램에 올라가겠지만, 단지 포스팅을 하고 다시 앱을 삭제할 것이다. 릴스와 그 ‘인플루언서’들의 영향력에 벗어나서,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있다. 분명 절망적인 세계가 될 거라면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싶겠지만, 희망은, 절망 속에서 더 가치가 있다. 그리고 변화라는 건 언제나 시작은 미미하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장사의 소문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은 1/10의 비율로 퍼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좋은 행동은 어쩌면 절대로 나쁜 영향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언젠가, 누군가, 이런 세상에 환멸을 느껴 자신의 우주를 지워내고 싶을 정도로 절망할 때, 당신처럼 절망한 이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절망한 자들의 유대가, 적어도 한 명에서 또 한 명만으로 느리고, 적고, 나약하게라도 퍼져나가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나약한 섬, 좁은 영토라도 차지하게 되길 바란다.
최근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을 엮은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있다. 단지 인간들뿐만이 아닌, ‘인간이 아닌 것들’까지의 이해를 위해서. 그래도, 세상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의지가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알아야 한다. 인생을 걸어 사고한 사람들의 지식을 얻어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 사상이라고 할 게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