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별로 완성되는 ‘관계’라는 것
립반윙클의 신부.
립반윙클의 신부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사실 아주 미묘한 지점이었어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과연 위로일까?’라는 생각. 죽어가는 마시로의 입을 빌려 나온 어쩌면 캐치프레이즈에 해당하는 대사인 ‘어쩌면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생경함으로 와닿더랍니다. 분명 훌륭한 시퀀스에 적절한 대사인데 왜 그럴까, 무엇이 마음에 턱 걸려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까. 하는 그런 마음.
저 역시 행복의 경계심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서, 아주 작은 행복에, 아니면 아주 급작스러운 행복에 대해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불안감은 행복이 커질수록 더 커지고요. 마시로의 말은 이렇습니다. ‘너무 행복해지면 부서질 것 같으니까, 나는 그걸 전부 돈으로 해결하려 해’라고. 이 마음은 조금 공감이 갔습니다. ‘겨우 나 같은 것 따위’를 위해 일어나는 선행이라니. 그런 기적 같은 걸 도저히 가만히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제 마음 한쪽에 박힌 가시 하나가 찌르르하고 떨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시로의 말에서 나온 ‘어쩌면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라는 대사가, 관객도, 어쩌면 주제도 아니라 그저 마시로의 입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행복의 경계는 그리 흔한 감상은 아니니까, 대사 한 줄 뚝 떼와서 이게 주제다.라고, 말하는 건, 조금 오독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뭐라고 할까요. 오히려 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다 보니, 그 마음을 쉬이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그에 관한 증거로, 나나미의 표정 또한 그에 감화나 이해의 영역이 아닌, 그저 받아들임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이후 두 사람의 입맞춤은, 사랑의 증거라기보단, 이 바깥 세계와는 다른 둘만의 공간의 유일한 짝의 느낌이 강합니다. (이마저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퀴어코드 역시, 조금. 생경함이 듭니다. 성애적 사랑이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좀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관계의 실패자’들의 연대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지점이라서 오히려 서로에게 목숨을 거는 약속을 더 단단히 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로의 경우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악역이면서 조력자인 이 독특한 포지션의 캐릭터에게 느끼는 감상은 ‘과연 인간인가?’ 싶은 부분이에요. 협박과 사기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저지르면서도, 일 처리와 위로에는 또 능합니다. 마시로와 나나미의 동반자살의 장면에서도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돈에 대한 이야기에 머쓱해하며 결국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모습에서 저는 묘하게 ‘인간’의 냄새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 지점이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엔딩에서의 마시로의 어머니와 함께 옷을 벗으며 오열하는 장면이었는데, 뭔가 이쯤에서 ‘알겠다 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로는 일종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아주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도구. 그러기 때문에 나만 쓴다면 너무 좋겠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공공재라고 할까요? 실제로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경우에는’ 도움을 받지만, 사실 나나미의 세계가 무너지는 가장 큰 킥을 후려친 것 역시 아무로 였으니까. (아마도 전남편 어머니의 사주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시로의 죽음 역시 무감정으로 대하는 것 역시 그에겐 그저 ‘들어줘야 할 주문’ 일뿐이었을 테니 그랬을 거로 생각합니다.
특히 엔딩의 오열하는 장면에서 이는 극대화됩니다. 이는 어떤 죄책감도 아니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마시로의 어머니’에게 느낀 소원을 이뤄주는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메이드 일을 고민하는 나나미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남편을 연기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나나미가 그 장면에서 ‘옷을 벗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맛있다!’라며 술을 마신다.라는 지점이, 이 상황의 뒤틀림을 더더욱이나 강조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나나미는 분명 ‘가짜’를 연기한 적이 있지만, 도구는 아니니까. 남에게 맞춰 적절한 반응만 가능한 도구-아무로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행복이 주제도 아니고, 가장 큰 주축 인물은 ‘인간’도 아니고, 생경함 덩어리의 영화로 왜 3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고, 소설책까지 쓴 걸까 하는 생각에 닿습니다.
그래서, 립반윙클의 신부.
립반윙클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생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공처가인 립반윙클이 마법에 걸려 20년 동안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생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시로가 ‘립 반 윙클’이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게 저에겐 ‘시한부’의 삶에 대한 은유라고 느껴졌어요. 마시로의 기준으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40에서 80년 정도의 삶이 남았겠지만, 마시로에겐 끽해야 2년 정도의 삶이 남았던 것이었으니까. 아마 마시로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그 의미가 좀 더 무거웠을 거라고, 약간의 짐작을 얹어 봅니다. 하루의 의미가 그렇게 커다랗다 보니, 행복의 역치마저도 낮아져 이내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너무 빨리 일어나 버리는 그녀. 삶마저도 끝이 있다는 걸 너무 빨리 목도한 지금에서 자기에게 허용될 ‘행복’마저 정해진 양이 있다고 생각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편으론 나나미는 모든 것을 ‘위탁’하는 삶을 삽니다. 특히나 거의 모든 문제 해결을 아무로에게 전가해 버리는 모습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죠. 결혼식 하객도, 남편의 외도도. 자기 몸이 위협받는 순간에서마저도. 그리고 그 뒤로도 그리고 그 뒤로도… 그래서 아마 아무로도 나나미를 ‘같이 죽어줄 사람’의 적격으로 생각해서 마시로에게 소개해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나나미는 어쩌면 ‘관계’라는 것이 애초에 형성이 돼본 적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수동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결정을 해본 적 없는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존재’ 정도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나나미는 그런 마시로와 ‘관계’를 형성합니다. 물론 이는 마시로가 아무로라는 도구에 요구한 ‘주문’이라는 지점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시로의 소원인 ‘자신과 함께 죽을 사람’ 즉 ‘자신과 같은 시간을 보내줄 사람’으로 나나미를 이용하고, 나나미 역시 자신의 ‘자아 위탁’을 마시로에게 이룹니다. 이 병적인 관계가 너무나도 잘 맞물려서 한편으로는 너무 아름답고, 두 사람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모습으로 비칩니다. 아니 실제로도 두 사람에겐 인생에 둘도 없을 행복한 시간이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결국 찾아온 ‘상실’의 순간에 마시로는 나나미를 동반자로서 데려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행복의 경계가 한계에 도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녀를 더 이상 자신의 시간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버리고 혼자 마무리를 지어버린 게 아닐까요.
여기서 나나미는 관계라는 것의 끝을 겪음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관계의 서사를 완전히 품게 됩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탯줄이 끊기듯, 마시로의 집에서, 관계에서 필수 불가결적으로 마무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시로의 어머니와의 대담에서도 혼자서 어머니와 아무로와는 다르게 ‘옷을 벗지 않은 채’ 자신만의 애도로 마시로를 떠나보냅니다.
이윽고 엔딩에 이르러 아무로가 같은 컵으로 합치려고 시도한 물고기-베타(실제로 합쳤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마시로의 선택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가 각자의 컵에 담겨있는 장면과, 나나미의 독립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누군가의 ‘종’으로 살던 나나미의 자립. 그리고 그 자립에 필요한 건 어쩌면 단 한 번의 온전한 관계가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습니다.
SNS의 관계가 과연 허상인가, 하는 것에는 조금 의문이 있습니다. 결국 스마트폰의 스크린 너머의 지점도 결국 ‘나와 다른 누군가’라는 종착지일 테니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저울질하는 것은 감히 어떤 누군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만 어떤 관계들은 조금 더 깊어지기 위해서 때론 얼굴을 마주하고, 살을 맞대고, 조금 무례하기도 하고, 비밀을 나눌 필요도 있습니다. 영화 초반 나나미의 결혼이 왜 그렇게 위태위태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참 그렇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줘 너무 쉽게 형성된 관계는, 만들어진 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거짓이라는 연료를 주입해야 하니까. 그리고 관계란 것의 가장 큰 뼈대는 신뢰라서 거짓이 섞이는 순간 무너지는 법 아닐까요.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일.
이제는 너무 소중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니 지금이라서 더욱이나 소중한 일이 되어버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