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모노노케 극장판 -우중망령-
살다 보니 취향이란 게 어찌 생겨선, 저도 꽤 오랜 시간 오타쿠의 삶을 살았더랍니다. 그때 향유하던 문화가 지금까지도 이어져선 전 여전히 <카우보이비밥>이라든지., <에반게리온>이라든지, 좀 더 깊어지면 <블러드:더 라스트 뱀파이어>라든지, <뱀파이어 헌터 D>, <팻숍 오브 호러즈> 등등등 여러 만화들을 좋아하곤 했어요.
다만 개중에 <모노노케>라는 만화는 좀 많이 달랐습니다. 다른 것들이 ‘좋은 것’, ‘멋진 것’, ‘재밌는 것’의 영역에 머물렀다면, 모노노케는 단연 ‘나도 이런 거 만들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애니메이션이었거든요. 원과 한과 그 슬픔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아름답고 처연한 연출에 더불어서, 그 이야기가, 그 각본이 너무나도 멋져서, 정말 오랫동안 마음을 빼앗겼던. 그런 애니메이션.
어른이 되고 나서 여러 사람들의 자리들을 파악하고 나니 <모노노케>의 이야기에 왜 그렇게 마음이 동했나 싶더니만. ’ 사회나 시대상에 희생된 여성의 이야기‘이더랍니다. 미혼모, 낙태, 성판매 사업등을 소재로 한 ’ 좌부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형 남성 대신 여성을 제물로 한 일이 원인이 된 ‘우미보즈’, 가부장 집안에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수십 수백 번 죽였던 ‘달걀귀신’등등… 07년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각도에서, 어쩌면, 비슷하게 죽음(관념적인 의미로도)을 강요받은 존재들을 비추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 모노노케의 17년 만의 극장판이라 조금 마음이 들떴고, 보고나선 역시 이 맛이지 싶더랍니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못할 만큼의 오랜 기다림이었지만, 괜히 만든 게 아니라 참 다행이다. 아니 잘 만들어줘서 고맙단 마음이 들었습니다.
극장판의 느낌은 TVA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색감이나 이미지도, 궤를 같이할 뿐이지 훨씬 선명하고, 선이 굵어진 느낌입니다. 아마 작업방식의 변화가 원인이지 않을까 합니다. 셀식 드로잉 방식에서 디지털을 한껏 사용한 제작방식으로. 간간이 보이는 3D연출 등에서 그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전작의 ‘분위기’는 가져오면서도 새로운 느낌입니다. 이 변화에 대해서 설득력을 부여하는 방식이 참 새롭습니다.
<약장수>라는 캐릭터가 이 <모노노케>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주축입니다. 사건의 탐정이면서 해결까지 하는 <집행자> 역할을 겸하고 있는 명실상부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이 존재는 늙지도 않고, 모노노케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두문불출하기에, 과연 인간이 맞나 싶은 의문점들이 존재해요. 일종의 신비주의 라고 할까요. 이 행보를 톺아서 여러 가지 설정 추가(64괘, 모노노케와의 관계 등)를 통해 이 괴리를 해결했더랍니다.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하는 약장수의 캐릭터성 변화가 설득이 되니 작풍의 큰 변화도 설득이 됩니다. 꽤나 영리했던 것 같습니다.
작중의 이야기의 배경이 <오오쿠>인 점도 참 흥미롭습니다. ‘태자’의 후궁이 될 사람들을 모아놓은 2000명 규모의 금남의 영역.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위한 ‘성상납’이 최고이유인 배경.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기괴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선 당연한. 그 괴리감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모노노케>가 지속적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기괴한 배경에 대한 선정은 아주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작중의 주연인 아사, 카메의 관계 또한 좋았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관대하다 못해 권유한다는 느낌을 주는 넷플릭스의 눈에 들었는지 알 것 같다고 할까요.
둘의 감정선은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줄을 타는 듯하면서, 그렇기에 정의되지 아니한 채 작중의 중요한 키워드인 ’소중함‘으로 표현되는 것 역시 참 좋았습니다. 특히나 결국 오오쿠에 한 주축이 되어 자리를 지키기로 한 아사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가 되더랍니다. 3부작으로 계획되어 있기에, 이 ‘여성들의 정념’으로 가득한 오오쿠의 이야기가 기대가 됩니다.
여러 모노노케 답게 연출들은 아주 빼어납니다. 특히나 <극장판>이라는 특성을 살려 ‘아 감독님, 원래는 이런 걸 하고 싶으셨군요’ 싶을 정도의 화려함+역동성이 아주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적재적소에 있는 액션씬은 TVA에선 정말 예산에 맞춰 타협했구나 싶을 만큼 이번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모습이,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액션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오랜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작품이 으레 그렇듯 전작의 오마주 또한 간간히 배치되어 있어서 팬들에게는 이만한 극장판이 없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다만 연출적 측면이 상당히 강조되는 작품인 만큼, 이야기 자체의 설명이나 관계가 부족하다는 감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모노노케>라는 작품자체의 특징이라서, 호불호가 갈릴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요소들을 찾아내는 걸 좋아해서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작 역시 호의 영역입니다만, 그런 서브텍스트들을 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친절할 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 이 극장판에, 참 마음이 많이 갑니다. 조금 겉핥기였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도 하지만, 이 극장판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역시 꽤 무겁습니다. ‘새로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질문. 저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요. 아마 저는 평범한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기에, 너무 쉽게 마음의 ‘마름’을 허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중의 주요 인물을 제외한 액스트라들처럼 ‘얼굴 없는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이게 뭐가 재밌음?‘이라는 말을 들을 거라는 약간의 확신도 들면서요. 그래도 저에겐 올해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빨리 2편이 나왔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