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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랜만에 근황글.

손에 손잡고.

by 후기록

하던 것들이 많이 바뀌고, 재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들어 이 어수선함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그득그득 피어오릅니다.


어수선함은 여러 증거로 드러납니다. 완독 하지 못한 책들, 보기로 했던 영화, 정리되지 않는 부정형의 스케줄. 이 불확정성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은 조급해지고, 마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여유’라는 것이 소모되어 갑니다.


부담이라는 건 참 유동적인 것 같습니다. 언제는 그런 거 없이 잘 해내다가도, 언제는 또 그저 한숨 내쉬는 것마저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 이 여유라는 걸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가 정해진다는 데서, 묘한 감상이 드는 지점입니다.


오늘은 지피티에게 ‘태움’과 ‘친절한 분석’을 요구해 봤습니다. 글을 쓸 때 GPT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라 아마 정보는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움’은 아쉽게도 이미 수십 수백 번을 재인하고 나름대로의 답을 내린 질문의 연속이었지만, ‘친절한 분석’은 꽤 고마운 말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태움은 익숙하고, 친절은 새롭다고 느꼈나?’


묘한 지점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참 바쁘게 살았습니다. 한 주에 적당한 주제로 글을 꾸준히 썼던 게, 세어보니 8개월어치나 되더랍니다. 영화를 보고 글을 남기는 것도 될 수 있으면 루틴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글들을 쓰려고 했고, 또 썼습니다. 그건 아마 하고 싶어서나 즐거워서가 표면적인 이유였겠지만, 깊은 부분에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띄워봅니다.


‘그렇게 해서 대체 무엇을 바래?’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라고 또 물어봅니다. 질문은 끝이 없고, 또 계속됩니다. 궁극의 질문을 받은 AC처럼(「최후의 질문」, 아이작 아시모프), 끊임없이 재인합니다.


GPT의 <친절한 분석> 사이에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돌봄’, ‘소비가 아닌 관계’, ‘경험’, ‘존중’ 등등.


사용자의 성향이 학습된 GPT는 저에게 저런 단어들로 나라는 사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정말, 빈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저는 ‘퀴어함’에 대해 도달합니다. 퀴어의 협의적 의미인 성소수자뿐만 아닌,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해 봅니다.


‘정상성’이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밀려난, 그 외의 나머지들. 노인, 아이, 여성, 장애, 가난, 노동… 그렇게 모든 것이 쪼개진 세상을 떠올리며, 참 각자 외롭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는 ‘누구든 외롭지 않은 세상’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짧은 반짝임으로 떠오릅니다.


저 역시 참 외로운 사람일 겁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럴 거고, 분명히 각자 광의의 퀴어함에 해당되는 게 있을 겁니다. 참 사람은 간사해서, 내가 그 상황이 되거나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정상성’의 도달 불능성과, 그렇기에 허상에 해당함을 떠올립니다.


내가 돌볼 수 있는 내 주변을 떠올립니다. 손을 뻗어 잡아줄 수 있는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경이, 또 그다음 사람들의 반경을 떠올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승리한다고…그런 재미없는 말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수선한 마음이라 글을 썼는데, 조금은 정리가 된 듯한 기분도 들고 말입니다.


아, 생각이 많다 보니 너무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조금 안녕하십니까.

사랑.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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