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오후의 기분 째지는 운동회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운동회였다. 걱정과 조바심, 기대와 설렘, 재미와 아기자기한 이야기, 크고 작은 해프닝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보름 전부터 비 소식이 예보되어 마음 한켠이 불안했지만 누구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단체 활동이란 게 다 그렇다. 주최 측이 알아서 다 할 테니 우리는 따르기만 하면 된다. 괜히 ‘취소’나 ‘연기’ 같은 말로 집행단의 마음을 흔드는 건 금물이다.
결국 당일 아침까지도 기상예보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혹시 틀리길 바랐던 마음이 오히려 실망을 안겨줬다. 총장의 뚝심이 위력을 발휘했다. 경기 진행 여부는 골프장의 규정에 따라 티오프 두 시간 전 최종 확정. 결국 운에 맡기고 일단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김총무가 운전하는 차에 위례에 사는 KS와 함께 동승했다. 가는 길에도 단톡방에는 걱정과 우려의 메시지가 오갔지만, 반응하기도 그렇고 해서 눈팅만 했다. 통화로 양해를 구하는 친구들을 응대하는 총무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친절했다.
라비에벨 cc에 도착하니, 세찬 빗줄기를 뚫고 30명의 전사들이 어김없이 집결해 있었다. 장수의 명령은 지켜야 하는 법. 충직한 병사들처럼 베이스캠프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카운터에서는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판단할 수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일단, 잡담을 나누거나 점심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강우량에 상관없이 무조건 나가자는 열혈 프로들이 라운딩 팀을 꾸렸고, 숙소에 들어가 마이티를 치자는 겜블러 팀도 결성되었다.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 초반에 날씨의 방해로 중단된 경기는 산해진미의 밥상으로 보상되었다.
걸쭉한 막걸리 잔이 왔다 갔다 하면서 농담과 만담이 진해졌다. 마이티 방에서는 누가 돈을 땄는지 잭팟을 터뜨렸는지 궁금하다.
몇 명은 춘천 시내로 이동해 스크린 골프를 치기로 했다. 나도 이쪽에 합류했다. 비 오는 날 골프 대신 스크린으로 방향을 튼 건 신의 한 수였다. 마치 낚시하러 갔다가 폭우와 풍랑을 피해 양어장에서 손맛을 보는 플랜 B 같은 묘수랄까?
강원대 교수로 퇴임하고 춘천에 자리잡은 HJ가 소개한 골프존 파크 매장은 고급스럽고 아늑했다. 자상한 성품의 JK가 ‘후세인 룰’을 조심스레 제안했다. 홀마다 돌아가며 후세인이 되어 연합군을 대적하며 짜릿한 티키타카가 벌어졌다. 변화무쌍한 핸디 트랩을 적용해 게임머니를 모으는 절묘한 방식이었다.
HJ는 스크린 잘 안친다면서도 장타와 내공을 뽐냈다. YK는 연습스윙을 하다 담이 결렸음에도 끝까지 집중해서 우승 스코어를 차지했다. 나는 스크린에 자신 있었지만 체력 한계로 후반은 나락까지 떨어졌다. 정와회 선수들이 필드와 스크린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프로임을 새삼 실감했다.
벌금을 내면서도 불쾌하기보단 기부하는 기분이 들었고, 상대의 실수가 나의 행복이 되는 유쾌한 경기였다. 그렇게 모인 금액은 저녁식사비로 기분좋게 쓰여졌다. HJ가 안내한 춘천의 맛집, ‘O지붕닭갈비’. 운치 있는 정원과 독특한 맛으로 연인들의 데이트 성지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철판 갈비볶음과 간장 베이스의 조림은 단골 메뉴로 올리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소양교가 내려다보이고 산토리니 풍 카페가 마주한 뷰 맛집, G.C.아틀OO에서 JK가 한턱내는 디저트 타임을 가졌다. 숙소로 돌아오니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흥에 겨워 있었다. 비 때문에 공은 못 치고 ‘空’ 쳤지만, 노래로 하루의 아쉬움을 만회하는 광경이 정겹기만 했다. KY프로가 노래방 비용을 호기롭게 정산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상남자!
둘째 날. 마치 전날의 궂은 날씨를 보상하듯, 청명한 가을 하늘이 열렸다. 총장은 친구들의 실력과 친분, 희망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모두가 만족할 만한 조편성을 해놓았다. 고교 3학년 시절 같은 반, 대학 동창, 동네 친구, 스코어 라이벌 등 조합이 절묘했다.
라비에벨 cc 듄스 코스는 난이도와 묘미, 조경과 경관까지 두루 갖춘 명문 구장. 일곱 번쯤 와본 터라 감이 좀 오긴 했지만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같은 대학교 출신을 두 명씩 묶어준 배려도 돋보였다. 하이로우 방식의 홀 매치도 후세인 룰 못지않게 재미있어 승부욕과 우애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 옛날 고딩 시절 학업 경쟁이, 나이 들어 운동 경쟁으로 이어지는 걸까? 50년 지기들이 강원도의 초원에서 청명한 하늘 아래 초추의 햇살보다 더 빛나는 초로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저녁 뒤풀이. 클럽하우스 연회장은 맛깔난 음식과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롱기스트, 니어리스트, 다 버디, 우수·최우수 플레이어가 호명될 때마다 갈채와 탄성이 이어졌다. 영광스럽게도 졸저 『참견과 오지랖』도 몇 권 강제 독자들의 손에 전달되었다. 언젠가 단톡방에 독후감이 올라올 기적의 순간을 떠올리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늘 그렇지만, 총장의 노고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프로그램 준비와 행사 진행, 기념품 마련까지 세심하게 챙긴다. 그러면서도 경비 지원과 시상품 협찬에 감사인사를 먼저 내세운다.
운동회 날은 어차피 ‘공치는 날’이다. 날씨가 쨍하면 기분 좋게 공(Golf Ball)을 치고, 날씨가 안 받쳐주면 그냥 공(空)을 치는 거지 뭐.
인생 뭐 있나. 지금 우리는 라비에벨에 있고, 인생은 아름답다(La vie est belle).
라. 비. 에. 벨!
La vie est belle!
Life is beautiful!
경북고 동기 50년 지기들이 봄·가을마다 모여 공을 치는 정와회(井蛙會) 정기 라운딩. 공(Ball)을 치면 더 좋고, 공(空)을 쳐도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인생 오후의 빛나는 가을운동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