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를 벗어나 진짜 공감으로!
했던 얘기를 다시 하는 건 김 빠지는 일이지만, 페이스북에서 ‘우수활동 인증’이라는 알림을 받았다. 최근 며칠 동안 활발히 글을 올리고, 다른 사람의 글에 공감하고 댓글을 남긴 결과라 했다. 솔직히 좀 생뚱맞았다. 이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 받은 건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우수팬 배지’였다. 그와 안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저 우연히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 눈에 들어왔고, 공감이 되어 ‘팔로잉’을 누른 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나는 그저 팔로워였고 그는 셀럽이었다.
그러다 올여름, 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애도의 문장은 절절했고, 그 속에 가득한 그리움은 차마 읽어내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나는 무심코 ‘좋아요’를 눌렀다가, 이내 ‘슬퍼요’, ‘힘내요’ 같은 이모티콘으로 공감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날은 용기를 내 댓글도 달았다. 과거의 작은 인연을 언급하며 애도의 뜻을 전하고, 그의 글쓰기를 응원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이 그의 슬픔에 닿으리라고는, 아니 당장 위로가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팔로워들의 댓글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감사의 답글을 남겼고, 내 댓글에도 답이 달려 있었다.
그 고마움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작심한 나는 그의 모든 글을 찾아 읽고, 마치 독후감처럼 정리하기까지 했다. 어쩌다 내가 남의 글에 지극한 정성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감상문을 쓰게 된 것이다. 떠나보낸 남편을 추념하는 그의 글만큼이나 밀도 높은 애도와 위로의 서사를 담고 싶었다. 욕심을 내어 ‘치유의 글’이라는 장르의 문학적 경지에 닿고도 싶었다.
며칠 뒤, 페이스북은 나에게 ‘우수팬 인정 배지’를 내밀었다. 사인 한 장 받으러 줄을 선 적도, 사생팬 같은 과한 흉내를 낸 적도 없던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인정받은 듯한, 작은 보람 같은 것도 느꼈다.
누군가의 글에 공감하고 독후감을 쓰는 건 결코 전략이나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시키는 행위였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스칠 때도 있다.
“혹시 나는 SNS 애정결핍에 걸려 있는 건 아닐까?”
내 글이나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구하고, 공감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반응하지 않거나 결과가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건 아닐까? 돌아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책을 출간하고 지인이나 유명 작가에게 보내놓고도 아무 리액션이 없을 때 마음이 휑해진다. 언론사 기자들에게 정성껏 이메일을 보내고 책을 전했는데도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을 때는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내 책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라는 자괴감이 따라온다.
심지어 메이저 언론사의 논설실장으로 있는 친동생조차 내 책에는 무심하다. 그가 쓰는 칼럼은 ‘진퉁’이고, 내가 쓴 광고 칼럼이나 창작 산문은 ‘짝퉁’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자존심에 은근히 스치듯 상처가 난다. 다시 한번 기사에 노출될 수 있게 도움을 청해볼까 싶지만 내키지 않는다. 동생의 성정에도 맞지 않는 일이고,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는 살아오지 않았다.
시대는 달라졌다. 전통 언론의 지면보다, 몇 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작가와 방송인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페이스북과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오늘날의 실질적인 미디어다. 나 역시 책을 낸 작가로서 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페이스북과 단톡방을 기웃거린다. 누군가의 글에 열심히 공감을 누르고,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기고, 때로는 책을 읽고 나서 며칠이고 끙끙대며 한 땀 한 땀 독후감을 써 내려간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출간한 나는 지금, SNS와 작가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가능성 앞에 서 있다. 기대와 설렘, 그러나 동시에 서운함과 자괴감, 무력감이 교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정의 소용돌이는 결국 나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찾게 한다. 책을 알리고, 독자와 만나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한다.
SNS는 때로는 애정결핍을 자극하는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독자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무대다. 공감 버튼과 댓글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꿈꾼다.
어쩌면 그 갈증, 그 애정결핍이야말로 내가 계속 글을 쓰는 힘일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솔직한 고백.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작가로 살아가야 할 이유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그 힘에 기대어 글을 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위로와 공감이 닿기를 바란다 ‘좋아요’보다 더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