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근, 《안녕, 다비도프氏》를 읽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열흘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 첫날, 백 쪽 정도를 열람실에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책을 덮는 순간,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과몰입했던 것 같다.
요즘 페이스북에 연신 농담과 개그 릴레이를 펼치고 있는 작가님의 노고에 호응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개구쟁이 같은 이 아저씨가 이렇게 진지하고 웅장한 긴 이야기를 짜느라 보낸 고단한 시간도 되짚어졌다.
잠시 투명인간이 돼 버렸다!
투명인간 이야기인데, 읽는 동안 온몸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이한 상태였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어떤 재미와 어떤 놀라움이 있을까?
어떤 불편함과 어떤 난감한 일이 벌어질까?
책 읽기 전에 이런저런 기대를 마음속에 세워 놓았고,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 기대들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사춘기의 머슴애라면 여탕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클지도 모른다. 안 돼. 그건 범죄다.
‘너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투명인간이 되어 선한 일을 한다면 그건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몸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야구장이나 콘서트 같은 구경거리도 공짜로 보는 재미. 반대로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마트에서 비싼 물건을 슬쩍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안 보여도 물건은 보인다. 그것들이 저절로 움직이면 오히려 난리가 날 것이다.
생각을 조금 비틀어, 내 물건을 다른 곳에 몰래 갖다 놓고 오는 상상까지 이어진다. 강아지나 쓰레기를 몰래 옮기면 불법 투기고, 내 돈이나 귀중품을 다른 자리에 두면 기부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한껏 상상 놀이를 하다가, 어느 순간 정말로 내가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과몰입한 나머지 눈을 부라리고 입을 씰룩거리고, 기묘한 웃음을 띠며 책갈피를 넘기고, 급기야 중얼거리기까지 했는데, 열람실의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들떠 있는데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니, 그 순간 도서관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조차 이상하게 보였다.
이러다 진짜 투명해질까 봐 겁이 나서 책을 덮었다.
다른 책을 꺼내 불투명 인간 모드로 돌아오려 했지만, 조금 읽다가 슬몃 졸음이 왔다. 몰입의 마법이 깨지고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빌려온 다섯 권의 책을 틈틈이 읽으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방금, 도서관에서 “내일까지 반납하세요”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투명인간의 기척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으로 글을 이어서 끼적여 본다.
"이 책이 내게서 흔적처럼 남긴 건 무엇일까?"
《안녕, 다비도프氏》를 읽다 든 생각들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데도 홀로 떠 있는 것 같은 기분.
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은 순간. 마치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서 한순간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나의 존재감이 스르륵 사라지는 느낌.
최우근의 소설 《안녕, 다비도프씨》를 읽으며 나는 그 ‘사라지는 느낌’이 정확히 어떤 것일지 어슴푸레 체감하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은 실제로 투명인간이지만, 그의 고독은 결코 특별하거나 판타지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순간에는 투명해질 수 있다.
주인공은 투명인간이라는 극단적 설정을 지녔지만, 그가 겪는 감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소외'와 다르지 않다.
말이 스쳐 지나가고, 내 표정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내가 방 안에 들어왔는지조차 아무도 모르는 순간들.
이 소설의 탁월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투명이라는 비현실적 장치를 통해 우리의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을 비춰낸다는 점.
그래서 나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보이지 않을 때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전환점은 ‘다비도프 쿨 워터’라는 향수다.
향수를 뿌린 주인공에게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기고, 누군가가 그의 향기를 감지한다.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존재.
스며들고, 남고, 여운을 만드는 힘.
생각해 보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남는다.
말투, 습관, 손의 움직임, 부드럽거나 날카로운 기운 같은 비가시적 요소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파티 장면에서 주인공은 여러 “향기들”을 만난다.
각자의 방식으로 투명한 존재들.
그 장면을 읽으며 이상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엔 이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러나 그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서로의 흔적을 알아본다.
책을 덮고 나서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다.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감지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가느다란 향처럼 남는 일.
책을 읽고도 한동안 향기 속에 머무르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던 이유가 바로 그 여운 때문이었을까? 그게 이웃에 전달하는 존재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책에 너무 빠져들어 읽다 보면 현실 감각이 조금 흐려진다. 책을 덮었는데도 인물의 말투가 귓가에 남고, 창밖 풍경이 소설의 배경처럼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 남의 인생을 살다 나온 기분. 이게 첫 번째 부작용이다.
두 번째는 감정의 잔향이다. 책 속에서 울고 웃고 분노한 감정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한다. TV 뉴스의 한 장면에도 괜히 마음이 쓰이고, 길에서 스쳐 간 표정 하나에 서사가 붙는다. 현실이 자꾸 이야기 쪽으로 기운다.
세 번째는 말수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책이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려서, 굳이 덧붙일 말이 없어진다. 대신 생각은 많아진다. 생각은 많은데 말은 줄어드니, 사람들은 조용해졌다고 말한다. 사실은 속이 조금 복잡해졌을 뿐인데.
가끔은 몸에도 남는다. 오래 읽은 날은 눈이 따갑고 어깨가 뻐근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피로가 싫지 않다. 마치 먼 길을 다녀온 뒤의 근육통 같다. 어딘가를 다녀왔다는 증거.
그래서 이 부작용들은 쉽게 끊을 수 없다. 약간의 멍함, 약간의 과몰입, 약간의 현실 이탈. 독서는 사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 불편 덕분에 삶의 감도가 한 칸 올라간다. 부작용이 없으면, 그건 아마 덜 읽은 독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부작용일까?
나는 요즘 조금 다른 짓들을 부쩍 자주 한다.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날엔 스스로에게 작은 향을 남겨본다.
글쓰기일 수도, 별 내용도 없는 짧은 안부 문자일 수도, 페이스 북에 떠는 오지랖일 수도, 나만 알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안녕, 다비도프씨는 내게 이렇게 말한 책이었다.
“너는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경고도 남긴다.
“너도 누군가의 향으로 남을 수 있다. 조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