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과 일상의 폭파

구소은, 《에펠탑을 폭파하라》를 읽고...

by 이에누

페이스북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공감 버튼을 누르고 댓글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것은 끊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학이시습지요 불역낙호야다. 얼굴책이라는 이름처럼, 여기에는 얼굴 대신 생각이 돌아다닌다. 따끈따끈한 콘텐츠들이 매일 쏟아지고, 일주일만 정신 차리고 읽어도 책 몇 권은 족히 읽은 기분이 든다. 공짜로 소비하면서도 늘 득템한 느낌이다.

거저 얻어걸리는 게 미안해 나도 부지런히 뭔가를 내놓는다. 브런치에 올린 글을 공유하기도 하고, 세태의 이슈에 오지랖 넓게 참견하기도 한다. 모임 같은 데 나가서는 맛보기 힘든 존재감을, 여기서는 오롯이 독점하는 기분도 든다. 돈 안 드는 공감 이모티콘을 주고받는 이 세계는 오프라인보다 더 공정하고, 냉정하고, 때로는 청정하다.

어쩌다 구소은 작가와도 그런 사이가 됐다. 그가 올린 글에 반응하다 보니 우수 팬이 됐고, 빨간색 이모티콘이 어김없이 되돌아왔다. 페친이 쓴 책은 자연스럽게 독서 목록의 상단으로 올라간다. 광고하는 사람들은 이걸 관여도라고 부른다. 아는 사람, 혹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된 저자의 책을 읽는 일은 관여의 농도가 확 올라간다. 그 사람의 문장에, 생각에, 나아가 인생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광고를 공부하고 돌아와 광고회사에서 일했다는 이력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등장한 에펠탑 그림은 단번에 시선을 붙잡았다. 4·3 평화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프로필도 그랬다. 평화라는 단어와 달리, 그의 행보는 늘 전투적이다. 격파하고, 돌파하고, 날마다 파격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폭파를 명령하고 있었다.




에펠탑이라니?
절대 폭파되어서는 안 될 기득권, 성역, 일상과 안온의 상징.
이 탑의 폭파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한 상징적 폭발을 낳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 왜 하필 에펠탑을 폭파하겠다는 위험한 상상을 키우고, 은밀한 계략을 꾸미는지 궁금해졌다. 소설에서야 무슨 일이든 못 할 게 없겠지만, 이건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음모였다.

동네 서점에 슬쩍 귀띔했다.
“이 책 요새 핫하다는데요.”

사장님이 팔랑귀였던지 신간 코너에 열 권을 쌓아두고 은근히 나를 압박했다. 내 책을 사게 하려고 당구 동호회 회원들을 유인해서 같이 들른 서점. 일주일에 걸쳐 그 책방에 놓여 있던 '에펠탑' 들을 모조리 ‘폭파’해버렸다.

《에펠탑을 폭파하라》는 집에서도 완독했지만, 도서관에 구입 신청한 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갔다. 토요일 한낮, 폭파되지 못한 잔해를 확인하듯 마지막 장까지 완전 철거했다.

책의 뒤표지 안쪽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소설책을 출간할 때마다 <작가의 말>을 썼다.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다섯 번째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작가의 말이 필요하지?’
작가가 하고픈 말은 소설 속에 있고,
이번 소설에 하지 못했다면 다음 소설에 하면 될 것을.
눈 밝은 독자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한 것을.”

역시 구소은답다. 쿨한 일갈이다.
동의한다. 작가가 덧붙일 말은 없어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소설 속에서 다 했다. 완전연소다. 나 같은 난독증 환자도 알아차릴 정도면 말 다 했다. 난독증이 없다면 이틀이면 폭파 가능하다.

문장은 단순 명료하고, 스토리텔링은 흡입력이 높다. 광고 일을 했던 사람끼리 통하는 게 있는 걸까. 하지만 이 책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에펠탑은 왜 폭파되어야 했을까?


에펠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관광 자원은 물론이고, 파리의 랜드마크에 그치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서 에펠탑은 너무 오래 당연해진 것들, 의심 없이 받아들여온 상징,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합의된 영역을 통째로 대리한다. 작가는 그것을 정면에서 겨냥한다. 조심스럽게 피해 가지 않는다. 대놓고 묻는다.
“정말 폭파되면 안 되는 걸까?”

소설은 파괴를 이야기하지만, 목적은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질문에 가깝다. 무엇이 성역이 되었는가, 누가 그것을 성역으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멈춰 서는가. 폭파 계획이 진행될수록 독자는 점점 불편해진다. 불편함의 정체는 두려움이 아니라 익숙함이다. 너무 익숙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거창한 이념이나 선언으로 독자를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아주 구체적인 장면과 인물의 선택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는 폭파 계획의 공범이 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관여하게 된다.

광고에서 관여도가 높아지면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에펠탑이 무너지지 않아도, 이미 마음속에서는 몇 개쯤 무너진다.

책을 덮고 나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에펠탑은 정말 프랑스에만 있을까?
내 일상에는 어떤 에펠탑이 서 있을까?
나는 무엇을 ‘절대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두고 있는 걸까.

《에펠탑을 폭파하라》는 폭파에 관한 소설이지만, 실은 재건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을 무너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끝나지 않는다. 타임라인을 다시 훑게 만들고, 댓글을 남기게 만들고, 누군가에게 “이 책 말이야” 하고 말을 꺼내게 만든다.

작가의 말이 필요 없다는 선언은 정확했다. 정말 필요 없다. 다만 독자의 말은 필요해진다.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읽는 순간, 이미 대화가 시작된다.

에펠탑은 여전히 파리에 서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 탑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게 이 책의 진짜 폭발력이다.

난독증 환자도 알아차릴 정도라 했지만, 사실 이 책은 쉽게 읽히는 만큼 쉽게 잊히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자꾸 몇 장면이 떠오른다. 왜 그 인물은 거기서 멈췄을까, 왜 나는 그 선택에 은근히 안도했을까. 그 질문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좋은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에 더 일을 한다. 《에펠탑을 폭파하라》가 딱 그렇다. 스포일이 될지 몰라 폭파의 성공 여부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뒷 처리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 역시 아직 정리 중이다. 아마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에펠탑은 여전히 서 있다.
하지만 내 독서 목록 어딘가에는
분명히 하나의 탑이 무너진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