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허 작가입니다만

글 쓰고 책내는 일엔 진심입니다!

by 이에누

글을 쓰는 사람이 독자보다 많은 시대. 글 읽는 사람보다 글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 같다.
독자보다 작자가 넘쳐난다. 매일매일 신간이 쏟아지지만, 그 많은 책들은 누가 다 읽을까?




먹고 입는 데 쓰는 돈은 안 아깝다면서 책 사는 데는 다들 인색하다. 작년에 책 두 권을 내고 나서야 출판시장의 현실이 비로소 실감났다. 그야말로 현타요, 충격이었다.

글쓰기 플랫폼이나 SNS에 가끔 올리는 글에 찬사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글 너무 좋아요.”
“작가님 글, 꼭 책으로 나오면 좋겠어요.”
책이 나오자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사인해서 한 권 보내달라는 말, 모임에 가지고 나오라는 말, 부쳐주면 고맙겠다는 말은 쉽게 오갔다. 정작 “서점에서 샀다”는 말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구입한 책을 가져와 사인을 요청하는 것이 저자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 아닐까? 혼자서만 여러 번 되묻게 된다.

책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책을 내는 것이 열망이었다. 글쓰기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다. 출간작가가 되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다. 그런 갈망을 부추기며 출간중독의 경지로 숨 가쁘게 몰아붙이는 작가도 있다. 책이 나오면 찾아올 쓰라린 기분을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잔인한 일 같아 모른 척 응원 댓글을 남겼다.
“글 너무 좋아요. 책으로 만나고 싶어요.”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열 권 남짓 증정본을 보내준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의 벅참은 지금까지 열 권이 넘는 책을 냈어도 늘 새롭다.
몇몇 친구와 지인들에게 보내고 나면 그 열 권은 금세 사라진다. 다시 내가 사들여 부쳐준 책만도 백 권이 다 되어간다. 출간작가를 응원하는 뜻에서 재력가 친구 하나도 백 권을 구입해서 그중 반은 나눠주고 반은 내게 돌려주었다. 재직했던 대학의 옛 동료교수들이 백 권 정도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남은 책들은 서재에 쌓아놓고 있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 서서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속표지에 헌사를 적는다. 받는 사람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사인을 하고, 봉투에 주소를 적어 직원에게 건네는 순간까지도 책의 온기는 한동안 손에 남아 있다.

그렇게 보낸 책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받자마자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오는 사람, 통화로 다시 한번 축하를 전하는 사람. 잘 읽고 독후감을 써보겠다는 포부도 전한다. 비록 공수표로 그칠지라도 그 말이 고맙다. 반면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어 확인 문자를 보내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끝내 아무 답이 없는 강철신경의 소유자도 있다.

며칠을 기다려 페이스북에서 독후감을 마주할 때면 울컥해진다. 짧은 감사 인사, 몇 줄의 감상, 때로는 겉표지와 사인된 속표지, 책 속 몇 쪽을 찍은 사진 몇 장이 전부지만 진심은 오롯이 전해진다. 보내드린 보람이 차오른다. 이런 분과의 인연은 오래간다.




남의 책을 진심으로 읽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들고, 며칠 동안 그 책에 붙들려 다른 일정이 뒤로 밀린다. 그렇게 읽고도 독후감은 쉽게 써지지 않는다. 어설픈 글은 나의 무지와 얕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겸손은 힘들지만 편리하다. 겸손한 척하며 미루다 보면 독후감 쓰기는 영영 물 건너간다. 그런 나 자신이 용납되지 않아 나는 몇 편의 독후감을 썼다.

신간이 출간되어 보내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오면 대부분 사양하는 편이었다. 독후감 부담 때문이었다. 사서 읽고, 진짜 우러나서 써야 진짜 독후감이라고 믿었다.
그래도 받은 책들은 기어이 읽고 톡방이나 브런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도 독후감을 적는 만용을 부렸다. 대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어설픈 말을 얹는 것이 예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망설임 끝에 그저 ‘독후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뜻밖에도 작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짧은 감사 인사, 혹은 공감 이모티콘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내 책에도 그런 독후감이 달릴까?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다.
물론 그분들은 너무 바쁘고,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등단한 작가들은 글쓰기의 생태계에서 계급과 지위가 높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발표, 문학상 수상을 예전엔 등단이라고 했다. 작가들은 카르텔을 구축하기도 한다. 협회나 멤버십을 만들어 문예지를 발행하고 거기에서 상을 받거나 작품을 몇 편 수록한 사람을 등단작가로 부른다. 멤버십 회원과 일반 회원은 대우와 기회의 차별을 엄격히 한다.

다양한 글쓰기 플랫폼이 작가들을 발굴하는 요즘 같은 디지털 환경에선 어울리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제도라는 게 중론이다. 그래도 굳이 등단을 작가 면허증이라고 표현하는 소설가도 있네? 내가 보기엔 적성검사 기간 지난 장롱 면허증 같지만 이 분의 입장에선 다른 신참 작가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훈장 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런 분께 책을 보낸 나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문단의 고수님께 추천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예전에 신예 작가들이 그랬듯이.


새로 책을 낸 작가들이 목을 매는 곳이 또 있다. 신문과 방송, 온라인 저널, 유튜브 같은 미디어다. 신간코너에 박스기사 정도라도 다루어지면 책의 홍보와 판매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페이스북도 좋은 홍보수단이다.




동생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J신문사 논설실장으로 일하는 동생이다. 평소에도 개인적인 부탁을 몹시 꺼린다. 그래서 책을 냈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칼럼니스트로 이름난 동생은 내가 쓴 신간 칼럼집을 봤어도 관심과 응원을 나타내지 않았을 것이다.


“형은 왜 글을 쓰려고 하지요?
웬만한 내용으로는 책이 안 팔리는 세상인데 왜 굳이 책을 낼 생각을 하는지요?”

질문이 뭐 이래? 답을 꼭 해야 하나?
그 말은 질문이면서 어쩌면 조용한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낸 책은 대부분 몇몇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박스기사 크기였지만 뭔가 마법을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기사가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지는 잘 모른다. 현역에 있을 때는 그랬지만 퇴임 후에 낸 책에 눈길을 주는 매체는 없었다. 3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J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에서 신문사에 책을 보냈다지만 그다지 반응은 없었다. 《광고에 말 걸기》는 고맙게도 신간 소개로 기사화되었지만 두 번째 산문집 《참견과 오지랖》은 아니었다.

출판 담당 선임기자에게 조심스레 메일을 보냈다.
지난번 보도에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이번 책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적었다. 사족도 붙였다. 동생이 논설책임자로 있지만 개인적인 부탁 싫어하는 성정이라 알리진 않았다고.

답이 돌아왔다. '논설실장 성정은 저도 잘 알고 있다.' 라는 짤막한 글. 그리고 그 책에 대한 기사는 주말까지 기다려도 신간 섹션에 일체 검색되지 않았다. 동생의 성정도 잘 아는 대기자님이 내 책의 됨됨이도 잘 알아서 패싱한 결과였으리라.

기자든 작가든, 보내준 책을 받고 기척 한번 안내는 분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추앙하는 마음만 받고 서가에 그냥 꽂아 두었을까? 몇 페이지를 훑어보면서 "이 친구 책 내느라 용썼네. 나의 초보 시절을 보는 거 같아. 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애를 불태웠을까? "받아본 책들을 언제 다 읽고 있어? 밀린 원고나 정리해서 빨리 넘겨야겠다." 이럴까?


플라스틱 휴지통이든 마음속 휴지통이든 내 책이 어딘가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모욕감이 밀려왔다. 나는 작은 복수를 결심한다. 구제불능의 뒤끝이다.
그들을 향한 대책없는 추앙, 쓸데없는 기대를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기로.


나는 휴화산도, 사화산도 아니다. 한때 분화했던 이력을 꺼내 놓고 아직 따뜻한 척 연기를 피우는 산도 아니다. 요즘의 나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땅속에서는 다시 열이 차오르는 중이다.
쓸 만한 문장을 찾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원고를 덮었다 펼치며 생각을 가열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쩍이는 순간이 온다고들 말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화 하나, 질문 하나가 그냥 지나가는 것 같아도 어딘가에 쌓인다.
“왜 굳이 글을 쓰려고 하는가?"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내 안쪽을 건드리는 작은 진동에 가까웠다. 바로 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래 남아 생각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글감은 그렇게 생긴다. 급히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한동안 묵혀두었을 때 문득 방향을 드러낸다. 지금 쓰는 이 문장들이 예전에 했던 말의 반복은 아닌지, 과거의 경험을 데워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된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간도 사실은 헛된 시간이 아니다. 겉으론 멈춘 것 같아도 안에서는 계속 끓고 있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문장은 쉽게 식어버린다.




책을 쓰고, 그 책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 앞에 설명하고 알리는 과정에서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나 자신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간다. 그 낯섦은 불편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쓰게 만드는 힘이 된다.
어쩌면 작가로 산다는 건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낯설어지는 쪽을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확신보다 의문을,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연료로 삼는 일. 지금의 나는 아직 아무것도 터뜨리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뜨겁다. 활화산이 되기 직전, 가장 조용하고 가장 뜨거운 순간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