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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31. 2024

카메라 셔터

나에게 다가오는 찰나

  소중한 순간들은 기억에 남아 추억이 된다. 훗날 삶이 지치고 녹록지 않을 때 꺼내보는 추억들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도, 살아가는 이유를 얻게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직하고 싶은 순간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나 보다. 아이를 낳고 보니 사진첩에 아이 사진이 갖는 지분율은 99%이다. '내 사진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없지만 아이의 삶에 나의 젊음, 열정, 슬픔, 기쁨이 다 담겨 있다. 그래서 용량이 가득 차고 비슷한 사진이 여러 장이지만 차마 지울 수가 없다.


  아이를 재우고 잠든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방 문 밖을 나서면 어지러 놓은 장난감, 설거지가 한가득이지만 쉽사리 등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진첩을 열어 의미 없이 사진을 쭉 내려보다가 눈이 머무는 곳에 손을 멈춘다. 처음으로 젓가락을 손에 쥐고 자장면을 먹던 순간. 음식을 먹은 것인지 피부에 양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해맑은 미소에 나도 같이 웃는다. 또다시 사진을 내려본다. 처음 불꽃놀이를 보던 날. 똘망똘망 크게 뜬 눈, 살짝 벌어진 입술, 하얗고 뽀얀 볼을 담은 네 모습에 잊고 있었던 그날이 다시 생각난다.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코끝을 서늘하게 하는 계절에 아이의 첫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 불꽃놀이가 뭔지 모르는 세 살 아이에게 밤하늘을 수놓는 불빛들이 얼마나 예쁘고 황홀한지, 그때가 되면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시간인지, 큰 소리에 놀라지 않도록 설명해 주는 내 마음이 설레었다. 아이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해가 지고 행사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아이의 귀를 막고 아이를 본다. 혹여 놀래서 울기라도 하면 불꽃놀이고 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아이의 동태를 살펴본다. 똘똘하고 까만 눈동자 위로 불꽃이 비춘다. 큰 소리에 놀래 굳어있던 아이의 표정에 점점 미소가 차오르는 걸 보고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에서 손을 조심히 떼어 보아도 웃고 있는 걸 보니 '행복'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불꽃놀이를 보았다.


  삶의 행복한 순간들은 불꽃놀이처럼 찰나의 반짝임으로 우리 곁을 왔다 간다. 화병에 꽂힌 꺾인 꽃이 아름다운 것은 생기를 머금은 그 순간이 잠깐이기 때문일지 모르다. 참고 견뎌냈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사실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쌓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나를 붙들어 주고 지탱할 힘을 갖게 해 주는 것은 나의 정신력도 다른 사람의 위로도 아닌 아이가 날 보고 웃어주었던 소리, 잠든 내 이마에 입 맞추고 출근하던 당신의 온기, 아파트 화단에 피어있던 라일락 꽃의 향기와 같은 잠시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다. '펑'하고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찰나의 행복은 마음속에 오랫동안 잔향을 남긴다.


  아이의 눈에 비친 불꽃에 잔향이 오래 남기를 바란다. 혼자 일어서고 버텨야 할 삶에 지치고 힘들 때 꺼내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 많았으면 한다. 스스로 견뎌내는 방법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고나니 이 순간을 담으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이의 얼굴에 담긴 환희와 사진 속에 담긴 감동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오늘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 귀갓길에 오른다. 많은 인파에 남편은 아이를 안아 들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오늘의 감동을 이야기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친다.

  "아까 아이를 계속 찍으시더라고요." 옆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부끄러움 덜하고 금방 친해지는 아줌마 파워가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낯선 사람이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네?" 의아하게 의중을 되물었다.

  "다들 불꽃 영상을 찍는데 아이를 찍고 계시더라고요." 본인도 불꽃놀이가 시작됨과 동시에 카메라를 켜서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앞쪽에 서있던 내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연신 아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아이를 보니 너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불꽃이 터지는 순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고. 카메라의 방향을 바꿔 자기도 아이사진을 담았다고 했다. 별 것 아니었던 이날의 짧은 대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나의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바꾸었다. 봄철 제주도의 데이지 꽃밭에서 인생 사진을 건지는 일보다 공주 원피스를 차려입은 아이의 놀이터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더 행복하다. 생일날이면 한껏 꾸미고 고급스러운 음식에 와인을 곁들이던 순간보다 아이의 이유식에 유기농 야채를 듬뿍 넣어줄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어느 날 몸과 마음이 지쳐 엄마로서의 내가 버거워질 때가 오면 행복했던 찰나들로 나를 안아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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