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억의 보자기 한편에 고이 간직해 왔던 내 어린 날의 소중한 기억을 근 40년 만에 꺼내 보려 한다. 매듭을 풀고 손 다림질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니 아름답고 순전한 산야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3학년, 중학교 교사였던 아빠가 포천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우리 가족 모두는 낯설고 물선 일동면으로 이주를 했다. 그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시냇물이 흐르며 신작로 먼지가 펄펄 날리던 완전한 시골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잠시 이곳의 전원생활은 평생 꺼내써도 모자라지 않을 심신의 평화와 함께 인격 형성에 근간이 될 아름다운 정서를 한가득 심어준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북에 가까운지라 반 친구들의 아버지 대다수는 직업군인이었고 나머지 친구들은 농사를 짓는 원주민의 자녀들이었다. 다행히 난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는데 청소 시간이면 학교 옆 개울에서 대걸레를 빨며 놀고 틈만 나면 산으로 들로 온종일 뛰어다녔다. 지천으로 피어있던 아카시아꽃을 엮어 예쁜 꽃목걸이를 나눠 걸고 토끼풀로 꽃반지를 만들어서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던 어린 소녀의 추억 마디마디에 향긋한 꽃냄새와 꿀 냄새가 난다.
여름에는 주로 친구들과 냇가에서 놀았다. 한낮 매미 떼의 합창을 뒤로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동을 따러 달음질치면 탐스럽고 실한 고동이 돌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누가 더 많이 잡았는지 내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치마 품에 고동이 한가득 찬다. 가끔씩 허리를 펴고 바라보는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가볍게 걸려있고 스치는 여름 바람은 어린 노동자의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 잡은 고동을 전리품처럼 엄마한테 쑥 내밀었다. 옷이 다 젖었다고 한소리는 하셔도 금세 마늘과 된장을 살짝 풀어 고동을 삶아 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별미였다. 한 김 나간 고동을 소독한 바늘로 쏙쏙 발라먹는 재미로 동생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소쿠리는 바닥이 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모습이 추억의 한편에 서 계신다.
빨래터로 가는 것 또한 내 소중한 일과였다. 난생처음 빨래를 밀고 헹구면서 흘러가는 시냇물과 눈 마주하며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었던 그 순간이 그리워진다. 나도 다시 그때의 내가 되어 어린 시절의 나와 다시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손아귀 힘이 없어 빨랫감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도 근처 바위에 널어놓으면 금세 말랐으니 그동안 신나게 물장구를 치면 그만이었다.
휴일에는 가족 모두가 근처 계곡에 가서 돼지고기를 자주 구워 먹었다. 깨끗한 계곡물에 참외와 수박을 띄워놓고 물놀이에 지칠 때쯤 한입씩 깨물어 먹던 수박의 시원한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엄마를 따라 산에 한창인 도토리를 주우러 다닌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상수리 나뭇가지를 털면 우수수 떨어지는 도토리들, 꼭지 채 붙어서 반짝반짝 윤이나는 도토리를 더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가득 채우고 나면 마음은 벌써 앞마당에 착실히 말려서 깨끗이 빻아놓은 도토리 가루로 만들어질 야들한 묵 생각으로 가득하다. 내려오는 길에는 이따금 떨어진 쌍 밤을 주워다가 평편한 면에 송진을 묻혀 밤 머리뼈를 부딪치며 놀았다. 적당히 꾸덕꾸덕 말려진 송진 덕분에 두 면이 부딪치는 소리가 ‘따닥따닥’ 거리면서 기분 좋은 마찰음이 났다. 자연에서 나는 모든 것이 놀잇감이자 학습도 구인 셈이다. 한참을 갖고 놀다가 지루해질 때면 이따금 들려오던 뻐꾸기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어 오후에 한적함을 깨우곤 했다. 산을 오르내리느라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자연이 선사한 선물로 풍요로우니 부족 할것 없는 시골 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여유가 있는 일상과 느긋한 삶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삶의 질을 사뭇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을 벗으로 삼아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응당 푸근하고 관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시의 윤택하고 편리한 삶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가족의 화목함과 사랑이 더 진해지고 이웃 간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던 매우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가슴을 활짝 펴서 그 시절 추억의 냄새를 맡는다. 저녁이면 실려 오는 밥 짓는 냄새와 가을 녘 들판을 태우던 구수한 짚불 냄새, 이른 봄 하늘거리는 아지랑이 냄새와 흙 마당에 떨어지는 비의 냄새가 추억과 함께 시절을 소환한다.
몸으로 익힌 기억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삶이 지치고 힘겨울 때 작은 구멍을 내어 바람길을 내어줄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릴 적 소녀가 밟고 뛰놀았을 산야가 마치 어제 일처럼 뚜렷이 그려지는 이유는 소중한 기억을 가슴 한편에 담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삶은 다시 그려질 수 있었고 살아갈 이유와 동력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제 오랜만의 추억여행을 뒤로 하고 다시 보자기를 고이 접어놓으려 한다. 어느 날 걷다가 가슴에 빛이 잦아들고 못내 외로움을 느낄 때 다시 꺼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네 귀퉁이 반듯하게 보듬어 예쁘게 묶어 놓고 다시 펼치면 감수성은 풍부했고 꿈이 별처럼 반짝이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