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고춧잎

by 한운희

모처럼 쉬는 일요일, 침대에 누워 중고앱을 서치 하다가 우연히 떠있는 공지하나를 보게 되었다. 약을 안쳐서 고추는 성한 게 없지만 고춧잎만큼은 싱싱하니 체험비 오천 원을 내고 원하는 만큼 뜯어가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무료하던 차에 장소도 하우고개로 가까워서 얼른 채비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로 5~6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고추는 물론이고 여러 작물들이 심어진 밭이 있다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밭주인에게 고춧잎 훑는 법을 간단히 들은 후 넓은 밭을 둘러보았다.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새순들이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한다.


신속히 밭고랑으로 입성한 나는 연한 새잎 위주로 고춧잎을 따기 시작했다. 쌉싸름한 고춧잎나물을 맛있게 무쳐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어릴 때 평상에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커다란

양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맛있게 비벼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정신없이 고춧잎을 따다 보니 어느새 밭고랑 하나가 다 끝나간다. 군데군데 붙어있는 새끼 고추들도 마냥 귀여웠다. 고추 줄기를 따라 새끼줄처럼 엮어진 어린 고추들이 하릴없이 따라 들어갔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보니 밭 주위에서 먹이를 쪼던 토종닭들도 더위를 먹었는지 울음소리에 힘이 없다.


이미 한 고랑이 다 끝났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체험이 재미있어서 가득 채워지고 있는 포대만큼이나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밭주인의 따가운 눈총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수확하고 포대를 꽉꽉 눌러 담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손이 멈춰졌다. 주인에게 눈치는 좀 보였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지를 깔고 가져온 포대를 쏟아 보았다. 같이 딸려 들어온 벌레들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막상 손질을 하려고 하니 도무지 이 많은 고춧잎들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순간 말도 안 되는 후회가 밀려온다. 소파에 누워 빈둥대던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들은 구시렁대면서도 내려와 앉아 고춧잎을 같이 다듬기 시작했다. “ 아들아, 이 많은 고춧잎이 전부 해서 오천 원 밖에 안 한단다. 이거 시장에서 살려면 몇만 원도 넘을 거야. 엄마가 이거 다 따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 동정심을 유발하는 나의 멘트에 아들은 고생 많이 했다고 내 등을 두드려준다. 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정리하니 시간도 금방 갔다. 덕분에 별로 관심도 없었던 ‘ 귀멸의 칼날 ’ 극장판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더 한건 엄마랑 한번 더 그 영화를 보아야겠다며 약속까지 잡아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고추 손질 값으로 너무 애기를 잘 들어준 것 같아 웃프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고춧잎 다듬기가 끝이 났다. 아들은 웃으며 ‘ 내가 평생에 고춧잎을 다 다듬어 보다니. “ 하며 껄껄 웃는다. 나는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 고춧잎을 소분해서 먼저 챙겨 놓고 고춧잎 삶을 물을 앉혔다. 소금을 넣어서 살짝 데치고 짜 놓으니 부피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파, 마늘 쫑쫑 썰어놓아 참기름으로 마무리하니 예의 그 신선하고 쌉싸름한 맛이 올라온다. 간좀 보라며 아들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원래 나물 같은 건 쳐다도 안 보았던 아들도 제가 다듬어서 그런가 맛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나는 반찬통에 나물을 정갈하게 담고 아까 소분해 놓았던 고춧잎을 챙겨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도 놀라신 모양새다.


” 네가 이 더운 날 이걸 직접 다 따왔다고? 나물도 맛있게 무쳐졌네. “


아빠가 특히 좋아하시니 먹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서 무쳐 먹겠다고 하신다. 뜻밖의 고춧잎으로 모두가 좋아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덥고 땀나는 하루였지만 새로운 경험이 일상의 환기가 되어주니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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