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없는 집에 살고 싶다. 우리집에는 고양이 둘이 있다. 놈들이 그루밍하며 삼킨 털과 위액을 카펫에 토하면 나는 마지못해 손주 떠안은 할머니처럼 궁시렁거리며 물휴지를 집어든다. 장난감 낚싯대들과 바닥부터 천장까지 고정시킨 캣타워, 거실 벽면 반이나 차지한 캣휠과 민들레 꽃씨처럼 온 집안을 부유하는 털, 털, 털... ‘고양이 친화적인’ 이 집에서는 알레르기 비염을 난치성 지병으로, 청결 강박증은 체념의 방어기제로 치환되는 자연 치유 질환 정도로 간주된다.
나는 정말 한 번이라도 숙면의 정석을 체험하고 싶다. 적어도 하루 다섯 시간 수면은 보장받아야 낮동안 사회적 동물의 몰골을 할 수 있지 않나, 피켓 들고 일인 시위라도 할 판이다.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두 놈이 번갈아 나의 잠자리로 찾아온다. 혼곤한 의식 속에 모른 척 반대쪽으로 모로 누워보지만, 놈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사제처럼 간곡하게 나의 동정심과 나약함이 응집된 겨드랑이와 가슴팍을 파고든다. 십삼 년 동안 고양이와 함께 여는 한결같은 모월 모일의 아침이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큰 고양이는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작은 고양이는 거리에서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우리집으로 왔다. 고양이를 소원하던 딸이 대학에 들어간 뒤 하숙방에 검은 고양이를 들이고 상수라고 불렀다. 학기가 끝나자 하숙 생활도 끝낸 딸과 함께 온 상수는 나의 피부양자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곰이도 와서 상수의 동생이 되었고, 나에게는 두 번째 종이 다른 직계비속이 되었다. 하여, 생명에의 경외감이라든가, 모든 존재의 고통을 나누려는 고결한 품성이 나에게 있는지는 다른 장면에서 찾아야 한다.
상수와 곰이가 온 뒤로 나는 길고양이에게 공연히 아는 척을 한다. 주머니에 고양이 캔을 챙겨 산책하고, 애써 배운 적 없지만 고양이 회화가 가능한 이종(異種)언어능력자가 되었다. 고양이를 자세히, 오래 볼수록 야생 동물을 순치시켜 반려동물이라는 용어에 가두고 함께 사는 것에 질문이 생긴다. 표정만큼은 불곰 못지 않은 곰이는 연어 한 마리 낚아채지 못하지만, 간식을 주지 않는다고 골 피우며 비닐봉지를 씹는 모습으로 보아 분명 여간내기가 아니다. 이따금 파리를 잡거나 테라스 옆 느티나무에서 떨어진 매미를 물고 보무당당 다가오는 상수는 들판에서 살던 전생의 기억이라도 희미하게 떠올린 걸까.
정이란 한여름 볕에 흘러내린 캐러멜 같아서 때로 지나치게 끈적거린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고 아기처럼 잠든 곰이의 심장 박동을 느낄 때마다, 치명적 급소인 배를 맡기고 문질러 달라는 상수의 무한한 신뢰가 가슴팍을 누를 때마다 ‘징하게 정이 들어버렸네’, 마음이 맵다. 인간의 집 밖 세상에서 이제는 온전히 살아가기 어려운 거세된 고양이들. 그리하여 나는 고양이가 없는 집에서 사는 세상을 꿈꾼다. 달 없는 밤마다 상수는 노란색 심지에 불을 붙여 두 눈에 박고 사냥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동면의 계절이 오기 전에 어쩌면 곰이는 아직 얼지 않는 강 한가운데 우뚝 서서 부지런히 물고기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