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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생이 미국에서 개발자로 일한다는 것은

개발자가 코딩 공포증이라니

by 밍풀

미국 살면서 이것저것 별로 겁내는 게 없어졌다. 언어야 하다 보면 느는 거고, 크고 작은 어려움들도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 하나 극복 중인 것이 있으니 바로, 스스로 이름도 명명한 코비아(coding + phobia의 줄임말), 즉 코딩 공포증이다. 내가 관찰해 본 코비아의 증상은 이러하다.



- 일단 에러가 발생하면 머리가 하얘진다.

- 커서의 깜빡거림이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의 눈처럼 무언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 분명 영어로 에러가 나와있긴 한데 어디서부터 시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진다.

- 그리고… 앞이 깜깜해진다.



공황 장애를 겪어보진 않았지만, 흔히들 말하는 공황 장애의 증상과 비슷한 것도 같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수학과 과학보다는 국어, 역사, 영어 등에 들인 노력 대비 점수가 더 잘 나오는 완벽한 문과생이었다.



대학교 입학 전 한참 AI 니, 4차 혁명이니와 같은 이야기들로 온 나라가 떠들석이던 때라 전공을 뭘 정해야 할지 한참 고민이 됐다. 특히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말씀하신 ‘성인 되면 경제적으로 독립해라’라는 말이, (대학 학비는 지원해 주셨지만) 나에게는 항상 마음의 부담처럼 다가왔다.


대학 졸업하면 스스로 먹고살아야 되는데 뭐 하면서 먹고살지?라는 고민으로.



그래서 VPN 도 알지 못하던 그때, 겁도 없이 Computer Science로 학과를 정했다.



그렇게 나의 코딩 여정은
대학교를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그 이후부터는 가시밭길이었다.



© cgower, 출처 Unsplash



분명히 영어로 적혀있고, 단어 하나하나 뜻은 아는데 왜 문장으로 조합하면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지.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코딩 과제들을 보며 앞서 말한 코비아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기졸업은 해야 되고, 그동안 들은 과목들을 무를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TA를 괴롭히고,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과제를 완수했다.




그래서 졸업 때까지도 사실 내가 개발자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졸업 반년 전부터, 취준 기간 동안 자신감이 한없이 추락할 때면 매일 구글링으로 ‘개발자로 살아남는 법’, ‘개발자가 적성에 맞는지’에 대한 내용들만 검색하며 혹시 나 같은 사람도 개발자로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곤 했었다.


당시에는 취업만 하면 내 코비아 증상은 없어질 줄 알았다. '취업을 했다 = 실력이 있다 = 즉, 코비아 증상은 없다'라는 이상한 공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것이 완전한 오산이었다는 건 얼마 안 가 깨닫게 되었다.


약 200 군데가 넘는 서류 광탈을 경험하면서 독기를 품고 릿코드를 300여 개 정도 풀어 4 라운드의 인터뷰를 통과해 현재 회사에 오퍼를 받았다.


회사를 오니, 이곳은 대학교보다 더 심한 무림지대, 초원 한복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하이에나의 눈초리를 피해 풀을 뜯어먹는 사슴과 다름없었다. 더 이상 모르는 게 있음 물어볼 TA도 없고 나의 실수를 그저 점수로만 환산하면 되는 곳도 아니었다. 성과를 못 내면 당장 내일 잘려도 찍소리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는 판국이었다.



물론 좋은 팀원들을 만나 처음 입사했을 땐 많이 도움도 받고 적응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항상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대학생활 3년 내내 겪었던 코비아의 증상이 다시 스멀스멀 나타났다.



이쯤 되면, '적성에 안 맞는 걸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이 생각은 대학교 2학년때부터 진작에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이유는 물러날 곳이 없기 때문이고(물론 그만두면 또 길은 생기기 마련이겠지만) 또 반골 기질처럼 물러서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이 일 저 일 겪으면서도 잘 지냈는데 고작 코딩 공포증 하나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면, 그건 조금 억울하지 않나 싶어서.



아직까지는 가끔 코딩 공포증을 괜히 먹는 걸로 풀고는 한다. 내 딴에는 극복하려 이 시도 저 시도했지만 아직 이 증상을 계속 품고 가는 중이다. 그래서 가끔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찾아올 때, 아이러니하게 유명인들의 일화를 통해서 위로를 얻곤 한다. 그중에서 단연 힘이 되는 건, 2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동안 명실상부 국민 MC를 책임지고 있는 유느님이다. 카메라 울렁증으로 인해 10년의 무명생활을 겪은 유재석 님. 그 보이지 않는 10년의 무명생활의 노력이 현재를 만들어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일한 지 4년 차가 되어갈 때쯤이 되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는 스스로에게 ‘그래도 뭘 좀 알긴 알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감사한 건, 대학교 때나마 코딩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내가 이 능력을 조금이나마 필요로 할 때 처음 발을 내딛는데 아마 더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란 것이다.


그나마 옆에서 보고 듣고 조금이나마 수박 겉핥기로라도 훑어가며 했던 노력들이 이제는 영어 듣기 평가처럼 코딩 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뚫리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은 에러가 생길 때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 아니라 코드를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며 어디가 잘못 됐는지 그전보다는 침착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1년 뒤, 2년 뒤, 3년 뒤의 내 모습이 더 궁금해진다. 이 길이 어떻게 나를 이끌어나갈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바라건대 스스로에게 떳떳한 개발자가 되고 싶다.


현재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Principal Engineer처럼. 실력적인 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끌고 여러 사람과 예의 있고 편안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되기를.



그러니 계속해서 용기를 내고 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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