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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일공공 Dec 20. 2022

열 세 살, 인생의 글짓기 교실



엄마는 나를 꾸미고 먹이고 공부시키는 것이 일상이던 사람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생명과 무관하지만 가볍지 않은’ 불치병이 있는데, 엄마는 이것 때문에 항상 죄책감 같은 감정을 표현하셨고, 그래서 나에게 해주었던 많은 것들은 어딘지 모를 애틋함으로 시작되곤 했다. 


지극히 평범한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 항상 나를 정말 독특하고 예쁜 옷으로 꾸며주었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80년대에 저런 옷이 어디에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유치원에 등원하는 평일에도 그랬지만, 심각한 건 ‘본격적으로’ 외출하는 주말의 옷차림이다. 스쳐 지나가는 어른들이 뒤돌아보며 다 한 마디씩 해주셨으니까.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그래도 이 정도 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한숨 한번 쉬고,) 문제는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엄마의 관심이 스타일링에서 학습으로 옮겨간 것이다. 


봉지 우유처럼 매일매일 집으로 배달되는 <일일학습>이라는 일명 ‘시험지’가 소소한 시작이다. 두 살 터울 동생이 <머리표 아이템플>을 시작할 무렵, 매달 배송하는 전 과목 학습지로 TV 광고를 시작한 <웅진 아이큐>가 3학년 때 내 이름으로 우리 집에 배달되었다. 그걸로 공부는 당연히 안하고 색색의 일러스트와 세련된 디자인 구경에, 부록으로 나오는 동화 읽기에, 바빴다. 

몇 달 후에는 <중앙완전학습>이라는 경쟁 학습지가 역시 TV 광고에 등장한다. 하필이면 4학년에 올라가는 나랑 딱 맞게 고학년 대상으로 출시되어 우리 엄마의 레이더망에 걸리고야 말았다. 회사원들이 쓸 법한 학습지의 파일함, 얇은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있는 과목별 요약집 등 교재의 외적 완성도는 훌륭했지만 (내적 완성도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모른다), 그렇다고 나를 책상 앞에 앉히지는 못했다. 




우리 엄마의 유별난 유난이 유일하게 성공한 거라면 그건 바로 ‘글짓기 교실’이다. 

국민학교 때 대단지 아파트 단지가 새롭게 조성된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 막 개관한 청소년회관에서 글짓기 교실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엄마가 출동 하신 거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선착순 방식이라, 엄마는 유치원 입학 신청 때처럼 아줌마들과 이른 새벽부터 자리를 잡고 잠을 설쳐가며 등록에 성공했다.

 

글짓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책은 많이 읽는 어린이라고 자부하던 나는 아동문학가 선생님이 가르쳐주신다는 말씀에 군말 없이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 산, 사, 자 (국어, 산수, 사회, 자연) 같은 과목도 아니고 피아노, 미술, 태권도 같은 예체능도 아닌데 ‘글쓰기’라는 것이 배워야 하는 대상인건가에 대한 의문이 열 두 살의 나이에도 있었다.

하지만 짧은 글이라도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겪은 경험을 예로 들어 쓰고, 그것을 현재 시점으로 끌고 오기 위해 따옴표도 붙여 보고,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의성어, 의태어 활용하기 같은 방법도 배우며 나도 모르게 글쓰기를 익혀가고 있었다. 


그냥 줄줄 읽으며 이야기만 따라갔던 내 독서 방식은 선생님의 지도하에 무엇이 잘 쓴 문장인지, 어떤 부분이 다시 곱씹을 만큼 좋은 표현인지 생각하며 읽는 방법으로 바뀌어 갔다. 한글의 아름다움과 단어의 소리를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의식하게 되었던 것도 이 때다. 


1년간의 과정이 끝나고 대부분의 친구들과 함께 창착반으로 올라갔다. 새로운 반에는 새로운 선생님이 계셨다. 반 대머리에 베레모를 쓰신 또 다른 아동문학가 선생님은 멀리서 봐도 작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첫 수업에는 집에 있던 선생님 책을 들고 가서 싸인부터 받았다. 너무 신나서 싸인 받고 뒤를 돌아 두 팔을 부르르 떨었다. 그 때의 교실 조명과 책상 배치와 내 자리로 돌아가던 몇 걸음이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난다. 


창작반 선생님이 계획한 대로 독후감, 수필, 시, 동화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커리큘럼을 어떻게든 따라가다보니, 한편의 글을 완성하는 즐거움도 작은 몇몇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하는 기쁨도 느껴 보았다. 

학교 밖에서 얻게 된 작은 성공의 경험이었다. 학교가 전부였던 국민학생 생활에서 내가 무엇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느낀 벅찬 경험이기도 했다. 




그리고, 질투가 있었다. 

가장 고학년이라는 이유로 옆 학교 남학생 A와 내가 창착반 반장을 나누어 맡았는데, 그 아이에 대한 선생님의 칭찬은 유독 남달랐다. 

“참 잘썼다!” 내 글에 대한 칭찬은 느낌표 한 개 짜리. 

A에 대한 칭찬은 “캬~~~~!! 너는 국민학교 6학년이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냐?!! 기가 막히다!!!!!!!!!” 문장도, 강조하는 부사도 여러 개에 느낌표 폭발이다.


선생님이 글쓰기 주제를 주면 후다닥 써내고 나서 떠든다며 얄미워했는데, 짧은 시간에도 그 만큼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글을 쓰다니. 

A가 쓴 글 중에 선생님께서 특히 극찬한 동화가 있었다. 내 수준에서는 아무리 읽어도 왜 잘 쓴 글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여러 번 읽어봐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 동화의 제목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만큼 어렵고 따라갈 수 없는 존재였던 거다. 내 맘을 알 리가 없는 같은 창작반 친구는 A와 같은 학교라면서 “생각이 특이하지만 정말로 똑똑하다”며 그에 관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글짓기 상을 받아올 때마다 나에게 칭찬릴레이를 퍼부으며 “너가 글쓰는 데 재능이 있나보다! 네가 어릴 때부터 어쩌고저쩌고… (음소거)”라고 했지만 나만 아는 찝찝함으로 언제부턴가 엄마의 칭찬과 격려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재능이란 건 참 불공평하구나’ 라는 생각.


열세 살 인생에 소질이 있다고 들은 건 글 쓰는 것 밖에 없는데 그 능력은 한계가 분명해 보이고, 나보다 엄청나게 큰 재능을 가진 그 아이는 재능이 하나가 아니라니. 노력이 있었을까? 그런 건 모른다. 열세 살 여자아이의 질투에 질문 따위는 없다. 

‘글 쓰는 것 말고도 공부, 운동까지 어떻게 모두 다 잘할 수 가 있어?!’ 마음속에서는 분한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올라왔고, 머릿속에선 부럽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또다시 질투가 났다.  


글짓기 교실 수료와 초등학교 졸업을 했던 그 해, 나는 ‘글쓰기’로 인생의 첫 성취와 첫 실패를 동시에 경험했다. A에 대한 마지막 소식은 서울대 **학과에 다니다 군대를 제대했다는 이야기까지다. 지금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이 소박하고 초라한 재주로 대학 졸업 후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글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사진제공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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