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text를, 인간은 Context를 읽는다

규칙 너머를 보는 '융통성', 우리가 길러야 할 마지막 생존 기술

by 레슬러 플라톤

"규정상 안 됩니다"라는 말의 차가움

2024년부터 우리나라 프로야구에 전 세계 최초로 '로봇 심판(ABS)'이 도입되었습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기계가 칼같이 판정하니 공정하다는 찬사도 있지만, 어딘가 삭막하고 인간미가 없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기계는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지만, 그 완벽함이 때로는 우리를 숨 막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답답함은 야구장에만 있지 않습니다. 관공서에서, 은행에서, 혹은 직장 동료에게서 "매뉴얼에 없어서 안 됩니다", "입력 값이 달라서 처리가 불가능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벽을 느끼곤 합니다. 앞으로 AI 기술이 발달할수록 이런 '알고리즘적 사고'는 세상을 더 촘촘하게 지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입력된 대로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 미덕일까요? AI가 모든 정답을 제시하는 시대에, 우리 인간이 길러야 할 진짜 능력은 무엇일까요?


규칙서는 불완전하다: AI가 읽지 못하는 '행간'

스포츠 철학자 J.S. 러셀(J.S. Russell)은 1999년에 마치 시간여행을 통해 2026년의 현재 로봇 심판을 미리 본 것 같은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심판은 규칙서만 가지고 판정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아무리 두꺼운 규칙서라도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변수와 돌발 상황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AI와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합니다. AI는 '텍스트(Text, 규칙)'를 완벽하게 읽지만, 인간은 그 텍스트 뒤에 숨겨진 '콘텍스트(Context, 맥락)'를 읽습니다.

축구 경기 중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규칙서 어디에도 "부상자가 발생하면 공을 밖으로 차내라"는 조항은 없습니다. '텍스트'만 보는 AI 심판이라면 "경기 진행!"을 외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지금은 승부보다 동료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맥락을 파악하고, 공을 밖으로 차내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것이 바로 AI는 흉내 낼 수 없는 '행간을 읽는 능력'입니다.


기계적 정답보다 중요한 '인간적 해답'

러셀은 심판이 때로는 "규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을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철학 용어로 '광의의 내재주의'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1mm의 오차도 없는 '기계적 정답'보다, 상황에 맞게 조율된 '인간적 해답'이 더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월드컵 결승전 후반 종료 1분 전, 수비수의 손끝에 공이 아주 살짝 스쳤다고 칩시다. 고의성도 없었고 공의 궤적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AI는 0.1초 만에 "핸드볼 파울! 페널티킥!"을 선언할 것입니다. 입력된 알고리즘상 손에 닿은 건 사실이니까요. 규정상으로는 맞지만, 짜릿한 결승골의 감동을 놓친 전 세계 팬들은 분노할 것입니다. 경기의 흥미와 흐름이라는 거대한 가치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훌륭한 인간 심판은 융통성을 발휘합니다. "고의성이 없고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판단하에 경기를 진행시킵니다. 이는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경기의 무결성'이라는 더 높은 가치를 지키기 위한 고도의 지적 판단입니다.



융통성, 우리가 훈련해야 할 최후의 무기

이 이야기는 비단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거대한 경기장과 같고,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세상은 점점 더 정교한 매뉴얼과 알고리즘으로 우리를 통제하려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해",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 뒤에 숨는 것은 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포기하고, AI의 하위 호환이 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식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매뉴얼을 달달 외우는 대신, "이 규칙이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통찰력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길로만 가는 대신, 상황에 따라 경로를 수정할 줄 아는 유연한 사고를 연습해야 합니다. 팩트 너머에 있는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읽어내는 눈치와 센스를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AI 시대의 인재는 '맥락'을 지배한다

규칙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규칙은 우리 삶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 우리가 규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AI는 결코 규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규칙의 행간을 읽고, 상황에 맞게 규칙을 재해석하며, 때로는 과감하게 예외를 둘 수 있는 '해석의 권한'을 가집니다.

딱딱한 텍스트 사이에서 피어나는 인간미, 차가운 매뉴얼을 뛰어넘는 따뜻한 융통성. 이것이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자, 앞으로 우리가 필사적으로 길러야 할 마지막 생존 기술입니다.

당신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입니까, 아니면 맥락을 읽고 판을 주도하는 심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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