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빼기 위한 고된 노동이 아니라,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러닝을 즐기는 모습이 늘어나더니, 언제부턴가 공원은 물론이고 도심의 밤거리, 동네의 작은 하천변마다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무리 지어 달리는 러닝 크루들을 마주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현상을 두고 "SNS에 인증샷을 올리기 위한 얄팍한 과시용 유행"이라며 가볍게 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단순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테니스처럼 화려하고 멋진 장비와 운동복을 입고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종목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러닝을 하며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과 숨 가쁨을 감수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이 거대한 '러닝 신드롬'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마침내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현상이자, 우리 내면의 폭발적인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모든 에너지는 '생존'과 '성장'이라는 바깥을 향해 있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우리는 앞만 보고 질주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노동을 위한 체력 비축'이거나, 경쟁자를 짓밟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BTS와 블랙핑크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이 전 세계인의 안방극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K-푸드와 K-뷰티는 하나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벽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구권 선진국들이 일찍이 겪었던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가 돈, 지위, 국가적 성취와 같은 외부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면 인간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자아)'을 향하게 됩니다.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과 쉼 없는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도구로 '러닝'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던 서양 사람들이 일찍부터 공원을 달리는 조깅 문화를 향유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스포츠 철학자 로버트 사이먼(Robert L. Simon)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논문 <스포츠의 내재주의>를 통해 체육 활동의 가치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직 다이어트, SNS 사진 올리기, 혹은 남들에게 보여줄 마라톤 완주 메달만을 위해 달린다면, 그것은 사이먼이 말한 '외재적 가치'를 좇는 것입니다. 외재적 가치만을 목표로 삼으면 체중계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거나 남들의 관심이 식었을 때, 여지없이 달리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운동을 또 다른 형태의 '노동'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거리를 달리는 수많은 러너들은 사이먼이 그토록 강조했던 '내재적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일정한 보폭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 두 발이 지면을 경쾌하게 박차고 나갈 때의 리듬, 오직 나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 박동에만 귀를 기울이는 완벽한 몰입의 순간. 러너들은 살이 빠지든 안 빠지든, 그 달리는 행위 자체가 주는 철학적 충만함과 기쁨을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스포츠 중 왜 하필 러닝일까요? 그것은 러닝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축구처럼 복잡한 전술도, 골프처럼 값비싼 장비도, 테니스처럼 나를 상대해 줄 타인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나의 두 다리'와 '뻗어 있는 길'만 있으면 성립하는 이 미니멀한 운동은, 로버트 사이먼이 말한 '탁월함'을 수련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철학적 행위입니다.
러너들은 타인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과정, 어제보다 1km를 더 달렸거나 1분을 더 쉬지 않고 뛰었다는 그 고요한 성취감 그 자체를 즐깁니다. 이것이 바로 선진화된 시민들이 향유하는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인 것입니다.
결과에만 집착하던 개발도상국의 마인드에서 벗어나, 과정의 즐거움과 내면의 가치를 탐구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거리를 가득 메운 러너들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는 가장 역동적인 증거입니다.
혹시 아직도 칼로리를 태우기 위해, 혹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 억지로 러닝머신 위를 걷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십시오. 러닝은 살을 빼기 위한 고된 노동이 아니라, 치열한 세상 속에서 진짜 나를 만나러 가는 가장 즐겁고 철학적인 수양입니다.
오늘 밤, 남들과 비교하는 세상의 속도에서 과감히 벗어나 오직 당신만의 호흡과 리듬으로 달려보십시오. 그 순수한 뜀박질이 당신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으로 안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