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카이와가 말하는 '일링크스'의 쾌감
과거 겨울철 대표 여가장소였던 스키장이 기후 위기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합니다. 전국의 17개 스키장 중 4개가 이미 폐업하였고,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줄어든 방문객 수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더하여 지구 온난화로 인한 제설 비용 증가와 슬로프 운영의 어려움은 경영난을 가중시켰고, '춥고 비싼' 스포츠라는 인식 속에 젊은 세대는 클라이밍이나 스크린 골프 같은 도심형 스포츠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성인이 된 이후 겨울마다 꼭 한 번 이상은 스키장을 방문하곤 했었는데, 정확하게 코로나 시기 이후부터는 스키장을 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로프 정상까지 올라가 하얀 설원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고 가슴 설렙니다. 오늘은 이 스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겨울은 본래 휴식과 동면의 계절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추위를 피해 웅크리는 이때, 유독 인간만이 영하 10도의 혹한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것도 모자라 수백만 원의 장비를 챙겨 가파른 산 꼭대기에 섭니다. 그리고 중력에 몸을 맡긴 채 미친 속도로 떨어집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이것만큼 비합리적인 행동도 없습니다. 춥고, 위험하고, 힘듭니다. 하지만 스키어들은 말합니다. 그 차가운 바람을 가를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요. 도대체 인간은 왜 안락함을 버리고, 거칠고 위험한 자연과 맞서려 할까요? 체육철학은 이 기이한 행동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능을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그의 명저 <놀이와 인간>에서, 우리가 노는 이유를 크게 네 가지 풍경으로 그려냈습니다.
우선 가장 익숙한 풍경은 '아곤(Agon)'입니다.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겨루는 '경쟁'의 영역이죠. 축구나 야구처럼 땀 흘려 기술을 연마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할 때 우리는 희열을 느낍니다. 반대로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운명에 결과를 맡기는 '알레아(Alea)'의 세계도 있습니다. 로또나 가위바위보처럼, 내 의지가 아닌 우연 앞에 겸허해질 때 느끼는 묘한 전율입니다. 현실의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을 때는 '미미크리(Mimicry)'의 세계로 떠납니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가면을 쓰고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 우리는 그 '모방' 속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하지만 스키어들이 설원을 찾게 만드는 본능은 앞선 세 가지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바로 네 번째 본능, '일링크스(Ilinx)'와 관련이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로 '소용돌이'를 뜻하는 일링크스는 안정된 상태를 파괴하고 일시적인 혼란과 현기증을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아이들이 어지러울 때까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행동이나, 비명을 지르면서도 롤러코스터에 몸을 싣는 심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성은 마비되고 감각만이 남는 그 아찔한 상태, 카이와는 이것을 인간의 원초적인 쾌락이라 보았습니다.
스키는 바로 이 '일링크스(Ilinx)'의 정점에 있는 스포츠입니다. 보통의 스포츠가 상대를 이기려는 '경쟁(아곤)'에 집중한다면, 스키는 중력이라는 거대한 힘에 몸을 던져 나 자신의 평형감각을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거대한 설산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예쁘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압도적인 크기와 위협적인 자연의 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즉 칸트가 말한 '숭고(Sublime)'에 가깝습니다. 칸트는 숭고를 '두려움이 섞인 즐거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나 깎아지른 절벽처럼, 자연의 위력은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우리가 안전한 상태에서 그것을 마주할 때 쾌감을 느낍니다.
스키는 이 숭고한 자연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을 넘어, 도구(스키/보드)를 이용해 극복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은 인간의 보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인간은 스키라는 기술을 발에 장착함으로써 그 저항을 '속도'로 바꿔버립니다. 미끄러운 눈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내려올 때, 인간은 거대한 자연을 정복했다는, 혹은 자연과 내가 하나 되어 춤을 추고 있다는 강렬한 효능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겨울 산으로 가는 이유는 단순히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평지)을 벗어나, 거칠고 위험한 중력(비탈)과 춤추기 위해서입니다. 로제 카이와의 말처럼,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영하의 바람이 뺨을 때리고, 속도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우리의 심장은 그 어느 계절보다 뜨겁게 박동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삶이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신가요? 그렇다면 이번 주말, 중력이 지배하는 하얀 세상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스키장에 예전만큼 사람도 없다고 하니, 더욱 여유롭게 스키를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지금 당신의 영혼에 기분 좋은 현기증이 필요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