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vs 소련

미국과 소련의 농업 비교(5)

by 만득이형

미국은 원래 지금처럼 농업이 체계적으로 잡힌 국가가 아니었다. 농업이 지금처럼 발전하게 된 것은 농업을 정책적-국가전략산업으로 만든 시초는 에이브리험 링컨이었다.

미국의 농무부 USDA

링컨은 1862년 미국에 농무부를 만들었다.

이 농무부를 만든 이유는 남북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업 생산 기반 및 노동력 부족 해결을 위해서였다.

또한 장기적인 식량 안보나 토지에 맞는 작물, 흙, 비료등을 연구하기 위해 농무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거나 간접적으로 속해있었기 때문에 표를 얻기 위한 작전이라 평가된다. 그래서 농무부를 '국민부'라고도 불렀다 한다.


미국의 농무부는 예산 기준이 막대히 크며 부처 순위 2위를 다투고 있는 부서이다. 농업은 미국 GDP의 2퍼센트 밖에 차지를 안 하지만 전 세계 농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 농업 전후방 산업 (재초제, 비료, 트랙터, 곡물운반-저장소 등등)을 생각하면 농무부는 미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 중부 곡창지대 부분

홈스테드법

1862년 당시 정책적으로도 농업에 대한 것이 많았다. 지금의 미국 중부 곡창지대가 당시에는 서쪽을 의미했는데 이 홈스테드법은 서부로 이주한 미국인, 이민자들에게 65헥타르의 토지를 무료로 제공했다. 또한 서부개척시대에 곡물생산을 위해 밭을 확장시키고 철도 같은 이동수단을 설치해 곡물 이동을 원활하게 만들고 트랙터의 발명으로 많은 농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의 농경지는 망가졌고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미국은 유럽 수요를 위해 농지를 확장과 농업 인프라 구성 등 농업이 점점 확장되었다. 그러다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했었지만 또다시 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수요가 시작되며 농업의 부는 점점 막대해졌고 기술력까지 발전하였다.

유럽이 전쟁으로 인해 농업적으로 많은 피해(식량 부족, 식량 인플레이션)를 겪은 비해 반해 미국은 곤란한 시기를 겪긴커녕 계속해서 성장해 갔다. 이와 더불어 곡물 메이저 기업 ABCD도 50~60년대에 많은 발전을 이루고 녹색 혁명 시대가 찾아왔다.



냉전시대 돌입 / 마셜플랜

유럽이 1,2차 세계전쟁기간, 그 기간의 텀을 생각하면 34년을 허덕였지만 그 사이에 미국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이라 할까? 이른바 마셜 플랜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유럽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한 유럽 국가들에게 무상 원조를 4년간 133억 달러 지원을 했다. 그와 더불어 산업 기술, 민간단체들의 지원까지 어마어마한 양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 북유럽의 산업은 다시 크게 부흥하였고 미국은 우방국을 얻게 되었다. 일부는 전쟁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고 알려진다.

농업 부분에서도 유럽은 미국 덕분에 파괴된 농지와 관련 사업이 빠르게 정비되었고 비교적 저렴한 미국 농산물 수입을 계속해왔다. 덕분에 유럽의 식량 안보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할 수 있다.



소련의 농업은?


신경제정책 시기의 농업

소련 혁명 전 1921년 내전으로 인해 붕괴된 농업 시스템으로 식량 부족 상태가 되자 NEP 신경제정책을 사용했다.


허용된 부분 :

곡물 강제 징발 폐지

세금 내면 농산물 자유 판매

소규모 개인 농사 허용 및 시장 부활


https://namu.wiki/w/%EC%8B%A0%EA%B2%BD%EC%A0%9C%EC%A0%95%EC%B1%85


이렇게 농업은 빠르게 안정되었지만 28년에 다시 폐지되어 집단농장으로 전환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련의 부분적 자유시장 농업정책이었다.


집단농장화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여 집단농장-국영농장 형태로 변형되고 토지-가축-농기구는 국가 소유로 전환되었다. 농민은 독립적인 생산자가 아닌 국가 계획 체제를 수행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이것은 소련 본토만이 아닌 연방 구성국에게도 강요되었다. 흑토지밭으로 유명한 우크라이나, 유목 목축 중심 카자흐스탄에도 강제 집단농장화 - 곡물 납입 및 강제 배급을 지시하였다.

집단농장의 이미지 - 쭈그려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 서서 감시하는 사람들은 공무원 직할에 간부들이다.

심지어 자발적 참여가 아닌 의무적 행위라 경찰, 군대가 동원되었다. 하지만 강압적인 참여와 더딘 발전 때문에 농민들은 대부분 의욕을 잃어 생산량이 급감했고 가축을 몰래 키우거나 도살하는 사람, 몰래 집 텃밭에서 개인 농사를 짓는 사람 등 저항이 강했다. 그리고 대기근까지 겹쳐 굶어 사망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집단농장 체제는 유지했으나 소규모 개인 텃밭을 허용한 시기가 있었고 농업 기계화와 납품량을 확대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하지만….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을 겪고 있는 사람들
오른쪽 자료는 미국이 소련으로부터의 농작물 수출을 확대할 것이라 기록되있다.


1,2차 세계대전

전쟁 참여국이었기에 군수 식량을 우선으로 소요했고 농업력을 총동원했다. 결국 인력 부족과 식량난이 되었다. 전쟁 후 에는 목표량. 가격. 납품 모두 국가가 통제했으나 집단농장의 비효율문제는 여전히 대두되었다. 소규모 개인 텃밭도 허용하였지만 목표치에 도달할 만큼의 양을 채우지는 못하였다. 결국 생산량이 여전히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여 미국에 금, 석유, 천연가스 등의 자원을 파는 대신 밀을 수입해 왔다. 체제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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