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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2. 2023

여행의 욕망



카스텔 노비에서 그림과 씨름하고 산책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스플리트가 궁금해서 윌과 스플리트를 구경하러 가 보기로 했다. 카스텔 노비에서 스플리트까지는 버스로 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옐레나라고 하는데 청소년이 된 두 아이를 둔 엄마이다. 그녀는 스플리트에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장기 여행을 하는 우리 커플이 신기했는지 우리에게 스플리트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커피 한잔하고 싶다고 해서 가기 전에 연락을 했다. 하필 만나기로 한 그날따라 도로 공사로 인해 길이 좀 막혀서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지만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옐레나가 우리를 보고 환한 미소로 반겨주면서 본인이 사는 집 근처에 공원이 경치가 좋다고 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그 공원은 Sustipan이라고 하는 곳이었고 스플리트 항구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움푹 들어간 지형을 기준으로 왼쪽 끝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걸어 들어가는데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플리트에는 아이들이 엄청 많다. 카스텔 노비에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내 주위 많은 사람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질 생각이 없다. 나 또한 아이를 두려워서 낳지 못하고 있는데 크로아티아에 아이들이 많은 이런 분위기가 새삼스러웠다. 나의 아버지는 6남매인데 6남매 모두 자녀를 둘 이상 낳았고, 그중에 결혼한 자녀는 나 포함해서 고작 4명이다. 14명 사촌 중에 10명(30세~40세)이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를 많이 낳는 나라들이 제공해 주는 정책을 연구해서 한국에 적용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통계 포털 KOSIS에 2022년 통계에 따르면 2022년 대한민국 출생아 수는 249,000명이다. 가임여성 1명당 출생아 수 합계출산율은 0.78이다. 1990년대 초 70만 명이 넘었던 대한민국 연간 출생아 수는 2020년에 약 27만 명에서 2023년에 23만 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2070년에 약 20만 명까지 감소할 전망이라고 한다. 당장 2010년에 470,000명이 태어났고 그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못 느끼지만,  2020년에 태어난 272,000명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2027년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및 모든 사업들은 그 규모가 지금의 반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내가 은퇴할 때쯤 되면 평생 내야 했던 연금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이고, 나라를 지켜줄 군인도 없을 것이고, 세금을 내어 국가를 운영해 줄 인구가 없어진다. 우리나라 시민들은 이민자들에게도 호의적이지 않다.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고 앞으로 곧 닥칠 우리들의 이야기인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공원 입구로 보이는 철문을 지나자 널찍한 계단으로 길이 나 있고 양쪽으로 짙푸른 나무들이 작은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길 끝은 막다른 골목처럼 낮은 돌담이 쳐져있었고 그 앞에 커다란 십자가 하나가 서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서  십자가 근처에 다다랐는데 왼쪽 옆에 사람 다섯 명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정말 작은 교회 하나가 나왔다. 옐레나의 아이들이 여기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십자가와 교회 맞은편에는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었고 그 절벽 너머로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아드리아해가 펼쳐졌다. 이 바다 건너에 작은 섬들이 있고 그걸 넘어서면 바로 이탈리아다. 



교회의 주홍 지붕 주변으로 펼쳐진 초록 잔디와 늘씬한 사이프러스 나무들, 그리고 푸른 바다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소나무도 어찌나 잘생겼던지, 크로아티아는 식물이나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외모가 참 잘생겼다. 겨울이었지만 날씨가 제법 따뜻한 낮에는 크로아티아 주민들이 공원 곳곳에 걸터앉아 이야기하거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교회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공원을 쭉 가로지르니 공원 끝에 옐레나가 말한 커피숍이 있었다. 커피숍이 위치한 지대가 높아서 요트가 정박한 모습과 함께 저 멀리 리바거리 (Riva Street)에 있는 야자수들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햇볕이 따뜻해서 우리는 바깥에 앉아서 이야기했다.



옐레나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전쟁을 피해 독일로 가서 자랐다. 독일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남편을 만나 다시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삶의 터전을 잡았지만 지금도 부모님은 독일에 계신다. 카스텔 노비에 우리가 예약한 집이 바로 옐레나 부모님의 집이고, 부모님은 카스텔에 날씨가 좋을 때 한 번씩 오신다고 한다. 집이 비어있으니 부모님께서 없을 때는 딸인 옐레나가 그 집을 에어비앤비로 활용한다고 했다. 남편은 직장 생활하고 그녀는 또 두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면서 집에서 틈틈이 독일어, 크로아티아어를 영어로 번역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물었다.

“숙박업을 하면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많이 힘드셨겠네요.”

“처음 코로나가 발병했을 때 많이들 힘들어했어요. 문은 닫은 레스토랑도 있고……. 나는 번역일도 함께 하고 남편도 일을 하니 좀 버틸 수 있었죠.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이 총 맞아 죽을까 봐, 우리 딸들이 강간당할까 봐 이 산 밑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이깟 코로나바이러스는 아무것도 아니죠. 적들이 바로 이 산 위쪽까지 쳐들어왔었거든요. 나는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우크라이나 사람들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크로아티아 역사를 공부는 했으나 이렇게 직접 전해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쟁의 개요는 대략 이러하다. 크로아티아는 원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소련의 도움을 받아 이 지역을 통일했다. 강력한 리더십과 독재로 유고연방은 평화를 누렸으나 그가 사망하자 민족적 지역적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6개의 공화국 대표가 위원회를 구성해 각 공화국 출신이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는데 세르비아 연방 내 권력 독점과 중앙집권화로 흘러가니 갈등과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고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크로아티아는 사회주의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하여 크로아티아 민족 자체의 나라를 세우려고 1991년 6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국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세르비아인이 다수로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이 전쟁을 크로아티아 인들은 독립전쟁, 조국전쟁, 세르비아 대침공이라고 부르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전쟁 혹은 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끔찍한 전쟁이 불과 30년 전이라는 말은 내가 10살 때쯤이란 말이고, 한국이 가난했지만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던 때이다. 당시 이 나라 국민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죽음의 위험과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다.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갈 때 지구 반대편에 누군가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코앞에 두고 공포의 그늘 아래 살아간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가슴만 먹먹해졌다. 그리고 옐레나는 말했다.

“스플리트는 관광도시예요. 코로나19가 처음 발병한 해에는 타격을 입었지만, 하지만 작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여전히 코로나19의 발병률 수치는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나라들이 각종 규제로 사람들의 발을 꽁꽁 묶어놓던 시기였어요. 스플리트 사람들은 올해도 힘들겠다고 걱정을 하는 찰나에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몰려드는 게 아니겠어요?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데 스플리트는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어요. 숙박업소에 방을 찾을 수가 없었을뿐더러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만들 재료도 없고 심지어 물까지 동이 났다니까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플리트가 이렇게 호황인 건 본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클럽에 들이닥친 수많은 유럽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이 세상 놀고 싶은 모든 젊은이가 그 나라의 규제를 피해 부다페스트로 도망치듯 와서 신나게 놀았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규제하는 정부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놀고 싶고 쉬고 싶은 욕망을 그렇게 하염없이 묶어놓으려고 하면 이렇게 터지는 법이다. 독일에 크리스마스 축제에 갔을 때 친구도 말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마켓까지 취소하면 사람들이 엄청 화가 날 거야”라고. 그리고 쾰른 크리스마스마켓 행사의 주최자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헤아려 행사를 오픈했다.

코로나19 시대에 여행을 가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여행을 가면 병을 옮길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며 최대한 집에만 있길 권장한다. 혹시나 여행을 떠나 병을 옮긴 사람들은 고소당하기도 하고 사회적 눈칫밥을 받으며 질책당한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위하고 눈치를 보며 집에만 있게 된 지 자그마치 1년 반이다. 나도 혹시나 내가 사회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해서 정말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되도록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혹시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거나 나가고 싶으면 집에 술을 사다 놓고 친구들과 Zoom어플로 화상채팅을 하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이놈에 병은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정부의 규제는 쉽게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평생 발을 묶어 놓을 수는 없다. 언제까지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 암묵적으로 그룹을 통제하는 사회적 규범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욕망을 막을 수 없다.  2019년 12월 코로나19 발병 후 이 질병이 빚어놓은 사회적 혼란이 백신 발명과 보급으로 안정화되는 듯 보이자 우리는 2021년 8월에 백신을 두 번 맞고서 바로 여행길에 올랐다. 


인간의 여행 욕구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아프리카에서부터 출발해 퍼져나간 호모사피엔스라는 인간종의 여행 욕구는 사실 생리적인 욕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Maslow)가 제시한 인간의 기본 5대 욕구 이론이 있다. 이중 1단계가 식욕, 수면욕, 성욕의 생리적 욕구이고 다음이 주거와 재정, 건강 등을 생각하는 안전 욕구, 세 번째가 대인관계, 소속감을 바라는 소속과 애정의 욕구, 네 번째는 명예, 인정, 존경 등 존중의 욕구. 마지막이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나는 여행이 자아실현의 욕구와 관계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하면 할수록, 주변을 둘러볼수록 인간의 여행 욕구는 거의 생리적 욕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성장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우린 떠나고 싶은 거 아니냐고. 밥을 먹듯이, 섹스를 하듯이, 잠을 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짐을 싸는 것 아닐까 하고. 사실 인간은 안정되고 싶지만, 막상 안정되면 불안해지고 또 참을 수 없이 모험을 떠나고 싶은 모순된 존재가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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