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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2. 2023

중세 도시에서 내 시간도 멈춰보기


 숙소에서 매일매일 다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중세도시에서 나의 하루는 알람 없이 눈을 뜨고 내 의지로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계절의 선명한 변화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집 앞 나무의 앙상한 가지에서 핑크빛 꽃이 마구 피어나더니 비가 한바탕 오고, 꽃이 졌고, 그 거칠고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여리디 여린 새잎이 돋아나는 과정을 유심히 보았다. 곧 부서질 것 같이 여린 그 잎이 새삼스럽게 기특하고 대견해 보였다. 


에어비앤비 집 앞 앙상한 가지에서 돋아난 새싹


매일 집 앞 바닷가로 산책하러 갔다. 카스텔의 2월 평균 기온이 거의 10도~15도여서 겨울치고는 매우 따뜻한 편이었다. 오후 햇살이 좋을 때 윌과 해변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를 맡으며 새파란 바다, 은빛 모래, 짙푸른 소나무들 그리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의 패티오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책을 읽고 사색하고,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을 고민해 보았으며, 사회와 개인의 입장도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관심 없었던 철학적인 책들도 궁금해졌다.

니체의 책이 궁금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국어 번역판으로 다운로드하였는데 단어들이 함축적인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꽤 어려웠다. 그래서 윌에게 한 챕터씩 같이 읽고 왜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는지, 그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자고 했고 윌은 영문판으로 된 책을 타블릿에 다운로드하였다. 원문인 독일어가 어차피 번역된 것이니 완벽할 순 없겠지만 우리는 한국어 번역으로 된 표현과 영문 번역 표현을 비교해 가면서 함께 토론했다.


이 책을 완독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조금씩 보면서 다른 책들도 함께 읽었다. 여러 책들을 보면서 나의 내면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이곳 중세 도시에서 나의 시간도 잠시 멈추며 그렇게 더 깊어졌다.



 나는 지금 아이패드를 사서 일러스트 그림 그리는 것을 독학으로 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미술부였고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쭉 취미로 유화를 그려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그림은 예전만 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직장생활을 할 때 아침 10시부터 6시까지 하루에 8시간 꼬박 회사를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시간을 살아내 왔다. 스무 살 때부터 일을 했으니 일을 하지 않고 쉬거나 공부한 기간을 이렇게 저렇게 3년 정도 뺀다고 하면 그래도 17년은 넘게 일을 한 셈이다. 이 중에 10년 정도는 한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시간이 모여 일했던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는 관리자(manager)라는 지위에 올랐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직장을 선택한 것이 아닌데, 시간이 지나 보니 그쪽 전문 분야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직장이 뜻밖에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려주게 되었고 나는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힘들다고 직장을 그만둬 봤자 무엇을 해야 할지도, 뭘 시작조차 해야 할지 모른 채 혼란과 생활고를 가져다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나이만 더 먹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는 이제 이걸 그만두고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렵고 엄두가 나지 않아 생각만 하고 항상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서 앞으로 전 국민에게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정책을 고려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고(물론 시행 가능 할지 의문이지만…….) 남편과 남편 사촌인 저스틴과 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이야기하게 되었다.

“너는 만약에 정부에서 한 달에 필요한 생활비를 모두 지원해 준다면, 그러니까 네가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 나가서 일할 필요가 없어져서 하루 종일 네가 하고 싶은 일 을 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

“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항상 먹고살 궁리만 하다 보니......”

“그래도 상상은 해 볼 수 있잖아, 하루 종일 시간이 있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그 하루를 쓰고 싶어?"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음… 아마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 같아."

“그럼, 지금은 왜 못해?"

“에이, 그림을 그려서 어떻게 먹고살아, 지금은 안되지. 실력도 없고......"

“왜 안 된다고 생각해? 너는 그러면 지금 하는 일을 처음 할 때부터 잘했어?”

“그건 아니었지.”

“그럼 지금은 너 하는 일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생각해? 자신 있어?”

“이 분야는 자신 있지."

“자, 봐봐. 네가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점심시간 제외하고 8시간씩 10년을 일했다고 가정을 하고 한 달에 22일 정도 일을 했다고 하자. 일 년에 휴가를 이 주 정도  갔다고 하고 말이야. 그럼, 우선 하루에 한 달에 176시간 정도 일을 하는 거고 일 년이면 2,112시간을 일을 하는 거고, 십 년이면 21,120시간을 투자한 거야. 휴가 간 시간 다 빼도 2만 시간이야. 그럼, 이제 상황을 바꿔놓고 네가 2만 시간 정도 그림만 그렸다고 가정했을 때 넌 전문가가 되어 있을까?

“그...... 그렇겠지? 아마도?”

“그럼,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게 좋지 않아? 지금 36살이니까 46살엔 그림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어있을 거 아니야?"

“……”


이 대화가 내 인생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대화를 하고 나서 곧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적절한 시간과 여유가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꽉 붙들어 매고선 보란 듯이 그림을 배웠다. 요즘은 디지털 파일을 많이 쓰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 과정을 등록하여 포토샵, 일러스트, 에프터이팩트, C4D를 배웠다. 확실히 앞으로는 동영상이 전망이 있을 것 같아서 동영상을 꾸며주는 프로그램도 배웠지만 나는 역시 손으로 그리는 2D미술이 좋았다. 과정을 마치고 열심히 이력서를 돌려 보았지만 아무도 나이가 많은 초보자의 이력서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여서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내가 회사 사장님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던 월급에 반정도밖에 받을 수 없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업무의 전쟁터에 패기 좋게 뛰어들었지만 3개월 동안 구직 활동을 하는데 단 하나의 회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그때쯤 슬슬 먹고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이 좋게도 친구의 추천으로 한 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어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콘텐츠를 디자인해 주는 일을 해 주기 위해 사업자를 등록하였다. 그리고 1년 정도 그 일을 하다 서로 사정으로 그만둔 후에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면서 실력을 향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보았지만, 시작부터 좌절의 연속이었다. 내가 그림 그려 놓으면 왜 이렇게 유치해 보이는지 선하나 만 긋는데도 자신이 없어서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림도 못 그리는 주재에 감히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너무 자신만만했던 건 아닌지,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아이패드를 켜고 하얀 디지털 캔버스를 한참 들여다만 보았다가 껐다. 나는 여행하는 동안 아이패드에 점 하나조차 찍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눈물만 나왔다. 윌에게 끊임없이 내 기분이 얼마나 거지 같은지 하소연했다. 그는 친절하게 내 하소연을 들어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붙들어 매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다짐해 보았다.

크로아티아에 가면 하루에 하나씩 그림을 그리자. 

나는 그림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무조건 하나씩 그려서 나의 소셜 미디어 아트 계정에 포스팅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나는 아침에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그림 그리려고 7시 반에 눈 번쩍 떠졌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 정신을 차려보면 오후 3시 정도 되어있는 게 보통이었고 내가 화장실에 갔는지 밥을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그림만 그렸다. 잠자려고 눈 감아도 내일은 무슨 컬러를 써보지, 어떤 걸 그려보지, 구도는 어떻게 해보지, 이런 걸 고민하느라 잠들기 어려웠고, 길을 걸을 때 모든 것들이 미술의 소재처럼 보였다. 하다못해 욕실에 다 쓰다 남은 비틀어진 치약까지 그림 소재로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과 헝가리에서는 점 하나도 못 찍었는데 크로아티아에서는 그림이 그려졌다.

하루 종일 숙이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랑 목이 너무 아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걸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이 고생을 혼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러다가 ‘인생 살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미쳐보자.’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블로그에 글도 쓰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사진도 찍고, 편집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지루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나를 위해 사는 하루가 너무 바빴다. 24시간이 모자를 지경이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매 순간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다. 일분일초가 감사했다.


크로아티아 카스텔 노비에서 그렸던 그림들


 뭐 거창하게 여행하고 돌아와 180도 달라진 나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예전에 일했던 직장생활로 돌아가도 괜찮다. 하지만 내일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 


여행 다니는 사람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보면 ‘나는 뭐 하고 있나, 저 사람 부럽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 또한 쉽지 않다. 사람들이 나에게 “여행해서 참 부러워요,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면 나의 첫마디는 “힘들었어요.”이다. 커다란 짐을 질질 끌고 다니며 이 숙소 저 숙소 옮겨 다녔다고 상상해 보자. 집에 오면 얼마나 좋은가!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여행하느라 걸어 다니고 짐을 지고 다녔던 그 피로가 집에 와서도 한동안 풀리지 않는다. 그걸 반복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장기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풀리지 않는 피로를 달고 옮겨 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 내 또래가 대부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없다. 집은 당연히 없고 차도 없고 아이도 없다. 흔히들 가지고 있는 양문형 냉장고도 없다. 세탁기는 혼자 살 때 쓰던 중고 6kg 일인용 세탁기를 아직도 쓰고 있다. 20대의 내가 지금 40대의 내가 사는 집을 봤으면 아마 ‘난 절대 40이 돼서 저렇게는 안 살아야지’ 했을 것 같다. 내가 여행길 위에서 찍었던 예쁜 사진만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여행을 위해 포기한 것은 모른다. 

나의 통장은 텅텅 비었지만, 나의 머리와 가슴은 책으로만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잔뜩 채워서 넣었다. 갖은 풍파 다 이겨내고 나이테를 하나 더 늘린 나무가 된 것 같다. 반지의 제왕 마지막 편에 호빗들이 고향에 돌아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주점에서 즐기고 있던 동네 사람들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절대 반지를 없애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여행길에 온갖 고생을 하고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들과 같다고 느껴진다.


 행복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내가 어떤 것에 행복한 사람인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 삶을 사는 사람인지 본인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 꼿꼿이 간다면 그들과 나의 행복을 비교하며 부러워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내 스타일이란 것도 없다. 자료 조사를 위해 인터넷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창의적인 사람들, 그림을 엄청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일 좌절한다. 이 좌절을 극복하면 또 다른 좌절이 찾아온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내 길을 천천히, 내 페이스대로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자존감 상실을 뒤로한 채 크로아티아의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다시 한번 힘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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