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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2. 2023

체크인, 카스텔 노비



우리는 자그레브에서 스플리트로 가는 플릭스 버스를 예매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옐레나가 스플리트 가기 전 도시인 트로기르에서 버스가 한번 정차하는데, 이곳에 내리면 본인이 숙소까지 픽업을 해준다고 했다. 우리 숙소 카스텔은 스플리트 공항 근처였는데 트로기르와 스플리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가는 버스 창밖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유럽 여행 중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산이 어찌나 높은지 산꼭대기는 거의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스위스와 같은 동화 속 풍경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힘차 보이는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그러고 나서 하늘색에 흰색 한 방울 섞인 듯한 빛깔의 바다가 나타났고, 바다를 낮게 둘러싼 C자 모양의 반도 지형, 그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홍색 지붕들이 나타났다. 버스가 높은 곳에서 내려가다 보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승객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서 동영상을 촬영하거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트로기르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내가 아끼던 야구 모자를 플릭스 버스에 덜렁 두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또 사면되겠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친구가 뉴욕 MOMA 박물관에서 기념품으로 사준 의미가 있었던 모자여서 나의 부주의한 성격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의미를 둔다는 것은 그래서 참 조심스럽다. 의미를 많이 둘수록 상실의 크기가 커지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 찬 찰나 금발머리에 키 크고 늘씬한 중년여성이 눈에 띄었다. 에어비엔비 호스트 옐레나였다.


우리가 머물게 된 숙소의 지역 이름은 카스텔 노비(Kastela Novi)라는 곳이다. 스플리트부터 트로기르 까지 반원의 만 해안가를 따라 4만 가구, 7개의 마을(Kastel Sucurac, Kastel Gomilica, Kastel Luksic, Kastel Stari, Kastel Novi, Kastel Stafilic)이 줄지어 있는데 카스텔 노비는 그중에 하나이다. 카스텔 노비는 1512년에 설립되었는데 1463년 보스니아가 함락된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던 달마티아는 오스만 제국 침략으로 위험에 직면했고, 15세기말부터 17세기까지 스플리트와 토르기르 사이 토지 소유주들, 베네딕토회 수도원, 귀족들이 그 땅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17개의 요새와 12개의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했다. 그래서 요새가 된 마을은 지금까지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배경지가 되기도 했다. 

카스텔 노비 옐레나의 에어비엔비

우리는 옐레나의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집은 사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큼직한 거실과 방들, 테라스에서 앞으로 푹 쉴 생각을 하니 몹시 설렜다. 그녀는 숙소를 이용하는 방법과 여행 정보를 브리핑해 준 후에 그녀의 집이 있는 스플리트로 돌아갔다. 스플리트에 오면 커피 한잔 하자고 본인에게 꼭 연락하라고 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일주일 정도 먹을 식량을 사러 슈퍼로 갔다. 숙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1분 정도 걸으면 베이커리가 있었고 좀 더 걸으면 5분 거리에 꽤 큰 슈퍼가 있었다. 장을 보러 슈퍼에 갔는데 물가가 부다페스트와 자그레브보다는 비쌌고 한국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헝가리에 있었을 때 보다 좋았던 점은 슈퍼에 해산물이 있다는 점. 그리고 5유로 정도 하는  플라벡 말리(Plavac Mali)라는 레드 와인이 맛있었다는 점이었다. 약간 스모키 하면서 블랙 체리 맛이 느껴지는 와인으로 쌀쌀한 날씨에 안성맞춤이었다. 플라벡 말리는 크로아티아에서 재배하는 레드와인 포도 품종으로 한국에서는 전혀 맛을 볼 일이 없다. 동유럽을 여행하며 좀 신기했던 것이 동유럽 자체 생산되는 와인이 이렇게 많은데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 마트에서 와인 코너에 가면 유럽 와인은 거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독일 정도만 봤었다. 동유럽 와인이 생소한 이유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와이너리가 가족 단위의 소규모 와이너리로 운영되며 생산량의 90%를 국민들이 마시고 나머지 10% 정도만 수출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서며 대량생산을 하며 질이 많이 떨어졌고,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며 와인이 수출될 수 없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참 낯선 와인이 되었다고 한다. 


장을 본 뒤 동네가 너무 궁금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숙소에서 나와 쭉 5분 정도 직진을 하니 바로 맑고 파랗게 반짝반짝 빛나는 아드리아해가 나타났고 커피숍들이 작은 항구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니 이곳은 14세기에서 시간이 딱 멈춰버린 유럽의 중세마을이었다. 2층에서 3층 정도 되는 베이지색 벽돌 건물들은 초록색이나 하얀색 창문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에 주홍색 지붕이 얹혀 있었다. 물론 어떤 집들은 수리를 했겠지만, 대 저택을 포함한 잘 지어진 집들은 14세기에 지어져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한옥마을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낡았지만 동네가 참 예뻤다.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서울에 살다 보니 건물이 낮게 밀집된 곳에 오면 일단 마음이 푸근해진다.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들이 뭘 하는지 보이고, 정원에 어떤 꽃을 심었는지, 텃밭에 뭘 가꾸는지 훤히 보인다. 마을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시간만 되면 중세시대에 울렸을 법 한 그 낡은 종소리가 2022년, 현재에도 사정없이 울려 퍼졌다. 집에 있을 때도 이 묵직한 쇳소리의 울림이 명랑하게  들렸다. 꽤 큰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시끄럽다거나 방해받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교회를 포함한 커피숍과 마을들이 마주 보고 있는 이 바다를 건너면 바로 이탈리아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셨다. 아메리카노를 시켜도 뜨거운 물을 한 사발 부어주는 한국과 달리 작은 잔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종이컵 반 컵 정도의 뜨거운 물만 부어주었기 때문에 조금 진했다. 



이곳은 놀랍도록 어린이들과 젊은 부부들이 많이 보였다. 다들 유모차를 끌고 아이들과 함께 나와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엄마들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지켜본 바, 평균적으로 바비와 켄 인형처럼 남녀가 모두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고 얼굴도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자주 피웠는데 특히 아기 엄마들이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손엔 담배를 쥐고 있거나 입에 물고 다니는 풍경이 흔해서 좀 신기했다. 가는 커피숍마다 담배 냄새가 진동해서 우린 주로 바깥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는데 날씨가 따뜻해서 오히려 더 좋았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를 걷다가 어떤 농부 한 분이 직접 재배하신 과일을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린 무화과를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이분이 판매하시는 과일은 숙소 근처의 슈퍼에서 판매하고 있는 과일 가격보다 거의 30~40% 정도 더 저렴했다. 과일이 조금 더 작고 못생겼지만 아주 싱싱해 보였다. 나는 말린 무화과 3천 원어치 정도만 사려고 돈을 드렸는데 원래 무게보다 더 많이 퍼주셨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나 시골 인심은 이렇게 좋은가보다. 이 농부의 이름은 안토니오였고 매주 월요일마다 이곳에 온다고 해서 나는 매주 월요일마다 안토니오에게 가서 말린 무화과, 사과 등 과일을 조금씩 샀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따스한 봄날 카스텔 노비에 체크인하고 거리를 산책하던 날을 생각한다.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즐겁고, 마음이 정화되고, 물가가 저렴해서 부담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휴식을 취하게 해 준 마을. 


누군가 완벽한 휴식이 필요한데 조금 의외의 장소를 선택하고 싶다면 나는 카스텔 노비를 적극 추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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