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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2. 2023

자그레브 산책



부다페스트라는 도시가 이렇게 역동적이고 아름다운지 몰랐다. 유명한 관광지 몇 군데 둘러보고 숙소에만 틀어박혀 책이나 보다 갈 줄 알았지 큰 기대 없이 와서는 넘치고 과분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다음에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동의했으나 어디서 머무를지 고민을 하며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스플리트라는 도시가 물가도 저렴하고 날씨도 따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2월의 스플리트 날씨를 찾아보니 기온이 높을 때는 13~15도까지 올라갔다. 기왕이면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이곳 근처로 에어비엔비를 찾아보다가 스플리트와 버스로 40분 정도 떨어진 카스텔 노비(Kastel Novi)라는 지역에 에어비앤비 사진을 보고 반해버렸다. 방은 두 개, 넓은 거실과 주방, 깨끗한 화장실, 그리고  커다란 테라스가 있었고 해변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푹 쉬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아 윌과 상의한 후 이곳을 예약했다. 

 스플리트를 가기 위해서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를 거쳐 가야 했는데 스플리트로 곧장 가지 않고 이곳 자그레브에서 삼박사일 정도 머물며 도시를 둘러보았다. 유럽은 나라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버스 이동이 편리했는데 우리는 주로 플릭스(Flix)라는 버스 회사를 이용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바코드가 찍혀있는 예약 확인 명세를 다운로드하고 버스 기사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버스에 탑승할 때 코로나19 시대였지만 백신 증명서는 따로 검사하지 않고 여권과 버스표의 바코드를 보여드렸고, 백신 증명서는 주로 국경에서 검사했다. 비행기를 타면 입국심사가 더 까다롭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겁도 나고 그랬는데 버스로 가니 국내 여행하는 것처럼 편했다. 절차가 더 수월한 느낌이었다.

 버스는 두 번 섰다. 헝가리가 끝나는 지점에 내려서 헝가리 경찰에게 여권을 보여주었고, 도장을 받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었다. 고속도로 매표소 같이 생긴 간이 건물에 버스가 멈추고 총을 찬 경찰 한 분이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의 여권을 걷어 가셨다. 그리고 좀 기다렸다가 단체로 내려서 줄을 선 다음 경찰로 보이는 분에게 여권과 백신 증명서를 보여주었다. 경찰의 질문은 ‘어디서 왔냐, 왜 이곳에 왔냐’가 끝이었다. 그렇게 5시간 정도 걸려 고속버스로 서울에서 부산 가듯이 부다페스트에서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자그레브에서 3일 있으면서 주로 걸어 다녔다. 버스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10분, 숙소에서 다른 방향으로 10분 걸으면 구시가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큼직한 크기였다면 이곳은 건물들 크기가 좀 더 아담하고, 붙어있고 다채로운 컬러로 벽면이 칠해져 있어서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헝가리도 물가가 저렴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그레브는 더 저렴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자그레브도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커피숍이 많았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너무 저렴하고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내부를 둘러보니 이곳에서 직접 커피도 볶고 블렌딩도 하면서 자체 커피를 판매하고 있었다. 

구시가에 가려고 걷다 보면 반옐라치치 광장이 나타난다. 레몬색, 크림색, 분홍색의 파스텔 색조의 건물들이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펼쳐져 있는 가운데로 파란색 트램이 지나다녔다. 광장 주변은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약간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은 기념품 가게, 옷 가게들이 많이 있어서 쇼핑하기 좋았다. 나는 이 근처 서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생각을 메모할 수 있는 공책 하나를 샀다. 

구시가 들어가는 골목의 입구부터는 알록달록한  2~ 3층 정도 되는 단층 건물들이 오르막길을 따라 쭉 붙어있고 아치형 입구들 앞으로 동그랗거나 네모난 귀여운 간판들이 붙어있었다. 구시가 초입 건물의 1층은 거의 레스토랑이나 바들이 많았고 입구 바깥쪽인 길거리에 일렬로 탁자와 의자들이 나와있었다. 겨울이지만 많이 춥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밖에서 먹었다.

골목의 사이사이로 사람 두 명 겨우 지나갈 만한 길들이 나 있었는데 그 길 위에 보이는 지붕들이나 가로등의 풍경이 그림 같았다. 우리는 지도를 찾아보지 않고 그냥 무작정 걸어 다녔다. 언덕진 곳으로 올라가니 레고를 연상시키는 지붕의 귀여운 성당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성당은 성 마르코 성당이라고 유명한 곳이었는데 내부에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성당을 등지고 쭉 걷다가 실연박물관이란 곳을 발견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사별이든 이별이든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과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 하나하나 담긴 사연이 너무 재미있었다. ‘상실’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낸 실연 박물관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사람들의 인생은 ‘스토리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구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들 하나씩 기막힌 사연들이 있는 것이다. 

박물관을 나와 어떤 건물의 코너를 돌아보니 자그레브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 있어 보이는 이곳이 자그레브에서 제일 좋았다. 이곳에서는 왠지 벤치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경치를 좀 감상하다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자그레브에 산다면 이곳에 자주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내를 전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의 난간 아래로 돌계단이 가파르게 도시 쪽으로 나있었다. 좁고 험한 돌계단을 따라 다시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번엔 골목을 따라 예쁜 카페들이 모여있었다. 작은 커피숍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초콜릿 무스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해서 잠시 쉬어갔는데 둘 다 맛이 아주 훌륭했다.


자그레브도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나에겐 삼일이면 충분했다. 아무래도 나는 물이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그렇다. 내가 사는 곳은 석촌호수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이고 잠실의 한강은 차로 15분이면 간다. 동서울역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만 가면 뻥 뚫린 동해 속초까지 갈 수 있다. 


얼른 바다를 끼고 있는 카스텔 노비의 숙소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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