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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3. 2023

피의 부활절, 플리트비체 폭포


3월에는 정오에 18도까지도 올라가서 반소매만 입고 산책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날씨가 풀린 3월부터 플리트비체 폭포, 크르카 국립공원, 또 다른 중세도시 시베닉을 둘러보았고 영화 맘마미아 2  촬영지인 비스 (VIS) 섬에도 1박 2일 놀러 갔었다. 


먼저 봄을 제대로 만끽하고자 벼르고 벼르던 플리트비체(Nationalni park Plitvicka Jezera) 폭포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플리트비체는 크로아티아 국립공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에 영감을 준 곳이다. 울창한 숲 속에 16개나 되는 호수를 품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폭포가 흘러내린다. 호수는 상류에 12개, 하류에 4개가 있는데 호수 간의 지형적 높이 차이가 133mm에 달하며 면적도 296,85 km2로  서울 면적 605.24 km2의 49배나 되는 크기이다. 에메랄드빛 호수와 계단식으로 높이가 다른 폭포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옐레나가 크르카 (Krka national park) 폭포가 가깝고 그곳은 아마 따뜻하고 좋을 것 같지만 플리트비체 폭포는 북쪽이라 아직 상당히 춥고 멀다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고민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영화 아바타를 너무 재밌게 봤는데, 그 영화 숲 속 배경에 영감을 준 곳이라 하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옐레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윌에게 강하게 의견을 말했고 우리는 행선지를 플리트비체로 정하되 돌아올 때 크르카 국립공원에 들르기로 했다. 

스플리트에서 플리트비체를 차로 가면 두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우리는 스플리트 공항 쪽에 있었던 ‘Dollar’라는 렌터카 회사를 통해 하루에 40유로라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차를 받았다. 어려움 없이 서류에 사인하고 배고파서 햄버거를 하나 사 먹고서 바로 플리트비체로 향했다. 가는 내내 아름다운 설산이 창밖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인터넷으로 플리트비체 폭포의 정보를 좀 찾아보니 공원이 너무 커서 하루 만에 못 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코스가 여러 개 있는데 국립공원의 어떤 부분이 보고 싶은지 검색해서 미리 정하라고 했다. 나는 코스와 지도를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H 코스가 마음에 들어서 H 코스로 봐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고 그 코스가 시작하는 플리트비체 공원 입구 2번(Gate2)에서 가까운 곳으로 에어비앤비도 예약했다. 가는 길은 우리나라 정겨운 시골 풍경과 비슷했다. 낮은 구릉들 위로 밭이 잘 갈려져 있었고 희끗희끗 연두색 새싹들이 돋아난 봄의 대지가 아름다웠다.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마치고 플리트비체의 에어비앤비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먼저 했다. 가족이 사는 집에 방 하나만 빌렸다. 나와 연락하던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젊은 남자였는데 그는 집에 없었고 그의 부모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곳에서 2번 출구까지 걸어서 15분이라고 하셨다. 짐을 가볍게 숙소에 풀고 바로 나갔는데 주차가 무료라고 해서 우린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설렘 가득 안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2번 출구에 도착했는데 2번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직원 한 분이 나와 성수기가 아니라 2번 출구는 폐쇄되었으니 1번 입구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이런…….’ 그래도 차를 가져가서 다행이었다. 버스를 기다릴 필요 없이 차를 타고 스르륵 5분 정도 올라갔더니 1번 입구가 나타났다.  플리트비체 공원은 한가했다. 주차장도 텅텅 비어 있고  매표소에 사람들의 줄도 길지 않았다. 2번 입구에서 시작하는 H코스만 생각하고 온 우리였기 때문에 1번 입구에서 시작한다면 어떤 코스가 가장 좋은 코스인지 몰랐다. 그래서 매표소 직원에게 물어봤다.

“혹시 추천해 줄 만한 코스 있을까요?”

“당신들은 선택권이 없어요. 우린 B 코스만 오픈했으니 표지판 보면서 B만 따라가세요."

우리는 이렇게  H코스를 체념하고 B 코스를 수용했다.



B 코스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인 가장 큰 폭포를 먼저 보고 트래킹 하는 코스였다. 폭포를 보고 나서 숲과 호수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트래킹 하며 보트 타는 곳으로 가서 보트로 작은 호수를 하나 건너고, 다시 1번 출구로 걸어서 돌아오던지 버스를 타고 오는 여정이다. 천천히 돌아보면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입장료는 비수기여서 80쿠나(당시 환율로 14,800원 정도)를 지불했는데 성수기면 1인당 1일 입장료가 300쿠나(55,000원), 2일 입장료는 450쿠나(83,000원)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시였는데 보트의 마지막 시간이 3시라며 충분히 시간이 있으니 여유 있게 봐도 된다고 마지막으로 조언해 주셨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플리트비체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폭포가 나타났다. 분명 길이 78m의 큰 폭포이긴 했으나 뭔가 웅장하면서도 아담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장엄한 느낌이 있다면 플리트비체는 신비스럽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른쪽으로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 같이 아름다운 큰 폭포가 떨어지고 살짝 왼쪽으로 각도가 틀어져서 다시 한번 큰 폭포의 반 정도 되는 높이에서 물줄기가 떨어진다. 계단식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에메랄드빛 호수 웅덩이들이 받치고 있었다. 북쪽은 많이 추울 것이라는 옐레나의 염려와 달리 정오에는 탱크톱만 입고 다녀도 될 정도로 날씨가 따뜻해졌다. 나무로 만든 길이 청록빛 호수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져 있었고 청둥오리들이 내가 걷고 있는 바로 옆 호숫가에서 나를 졸졸 따라오며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걷는 내내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폭포 소리, 바람 소리로 행복함에 푹 젖었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봄을 제대로 느끼고 싶거나 마음이 복잡해서 힐링하고 싶으면 플리트비체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이렇게 봄의 정기를 가득 몸에 채워 넣고 우리는 성공적으로 국립공원을 빠져나왔다.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이 마을에 저녁을 제공하는 레스토랑도 딱 하나밖에 없어서 고민 없이 그곳에서 식사했다. 뷔페처럼 나열된 음식 중 먹고 싶은 걸 고르고 미리 계산을 하는 방식이었고 윌은 소시지와 으깬 감자를, 나는 꾸덕한 소스에 버무려진 쇠고기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2번 출구 앞의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갔을 때 아직 해가 좀 떠 있어서 밖에서 차를 한잔하고 싶었다. 문제는 차를 마시려면 주방을 써야 하는데, 가족들이 다 쓰는 공간이라 주방을 허락 없이 쓰기가 애매했다. 내가 쭈뼛거리며 주방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때 마침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데니스가 일 마치고 집에 와 있었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갈색의 짧은 머리에 키가 훤칠하고 앳된 얼굴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혹시 밖에서 차 한잔 마시려고 하는데 차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밖에 앉아 계시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그는 잠시 후 예쁜 찻잔에 가득 담긴 블랙티에 레몬이랑 설탕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현관문 밖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사하다가 그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데니스의 부모님은 영어를 못 했지만 데니스가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윌과 나는 여행하면서 궁금했던 점을 데니스에게 마구 물어보았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서 신났다. 항상 둘만 있으니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둘 다 신이 난다. 


“원래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렇게 친절한 거예요?”

 우리가 만난 크로아티아인들이 모두 친절했기 때문에 먼저 이렇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당신들이 비수기에 와서 다들 도와주려고 하지, 성수기 때 왔으면 귀찮아하거나 불친절하거나 피곤해서 말도 하기 싫어했을 거예요.”

라고하며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킥킥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우리의 두 번째 질문.


“왜 크로아티아인들은 일반 시민들이 영어를 다 잘하는 거예요?”

이곳은 크로아티아 언어가 있는데도 마트 직원, 우체국 직원이며 일반 산책하는 어린 학생들까지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보면 영어로 거침없이 술술 알려주었다. 

“크로아티아 방송에서는 영미권 방송이 주로 많이 나오는데, 영어를 그대로 틀어주고 크로아티아어 자막으로 해서 나오기 때문에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영어를 빨리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데니스는 우리에게 폭포는 잘 다녀왔냐고 물어보길래 너무 좋았다고 말했더니 그가 우리는 좋은 시기에 온 거라고 행운이라고 말해주었다. 

“성수기에는 하루에 20,000명씩 입장해요. 나는 지금 경찰이 되었지만, 예전에 플리트비체 폭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었는데 여름엔 폭포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서 걸어야 하고 폭포를 찍어도 사람들이 배경으로 나오죠. 저는 그 수많은 사람이 같은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는데 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해 줘야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나도 안다. 업무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상대하지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니 내가 마치 녹음기에 버튼을 누르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데니스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3년 동안 일했는데 3년 후면 국립공원에서 법적으로 풀타임으로 채용해야 했고 코로나 시기로 재정이 어려워진 국립공원은 그를 포함한 수백 명을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경찰공무원 공부를 하여 지금은 경찰이 되었다. 그와 이야기하던 중 사실 그가 태어난 곳은 크로아티아가 아니라 보스니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연이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30년 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의 서막이 바로 집 앞인 플리트비체 2번 입구에서 발생했어요. 우리 가족들은 그때도 바로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이 난리 통에 피난을 가야만 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며 남으시고 엄마와 아빠만 보스니아로 피난 갔죠. 거기서 내가 태어났어요.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이 무사히 돌아왔지만, 아직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보스니아에 남았어요. 지금도 보스니아에 가면 세르비아인들, 크로아티아인들, 보스니아인들이 섞여 지내고 있는데 저는 지금도 그곳에 가면 묘한 긴장감이 느껴져요. 아마 이곳에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보스니아일 거예요.”


 난 여행자라 다들 우리에게 친절해서 아직도 이렇게 긴장감이 존재하는 줄 몰랐다. 이렇게 현지인의 증언을 듣고 나서야 왜 이곳이 유럽에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난 그에게 왜 전쟁이 여기서 일어났을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이곳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 주변에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섞여있어서 갈등이 심했어요. 그리고 플리트비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서로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럴듯한 추정이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여름 성수기에는 40유로인데 성수기는 하루에 20,000명씩 입장하니 이것이 사실이면 하루 수입이 11억 인 셈이다. 나는 데니스 한 사람 삶의 이야기를 듣는데 무슨 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았다. 

데니스가 말한 전쟁의 서막 사건은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혹은 ‘피의 부활절 사건’이라 불린다. 이 사건은 1991년 3월 31일 크라이나 지역의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이 국립공원 경찰관이었던 요시프 요비치를 살해하는 사태가 발행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 사건을 말한다. 

1990년,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원하는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내 민족 갈등이 심해졌다. 유고연방시절 지금의 크로아티아 영토 중 세르비아민족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위기를 느낀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세웠다. 이들은 1991년 3월 25일 플리트비체에서 정치 집회를 열고 플리트비체를 크라이나 지역에 편입시킬 것을 요구 한 뒤에 이 지역을 장악하고 크로아티아 공무원들을 쫓아냈다. 그러자 크로아티아인들은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경찰병력을 파견했고 30일 탈환에 성공한다. 하지만 31일 부활절 오전 7시 크라이나가 설치한 바리케이드 부분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이 습격당하게 된다. 이 무력 충돌로 인해 결국 4월 1일 유고 인민군이 개입하여 크라이나와 크로아티아 경찰에게 철수를 명령하면서 잠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결국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국민 투표를 하고 독립을 선포하며 유고슬라비아와 모든 관계를 끊고 5년간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판타지 영화에까지 출연한 이렇게 아름다운 폭포가 가지고 있는 피의 부활절이란 역사가 초록색과 붉은색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는 데니스와 대화를 나눈 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크로아티아는 사실 독립한 나라로 지낸 역사가 매우 짧다. 1941년 나치세력과 함께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유고왕국에서 분리되었는데 이때 지도자인 안테 파벨리치는 인종 청소의 명목으로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가톨릭이 아닌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얼마나 많이 잔인하게 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나치를 내세우며 독립을 주장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7개의 나라가 사회주의 이념을 가지고 함께 안정된다. 하지만 티토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민족들 간의 갈등이 다시 붉어지는데 유고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을 원하는 민족들과 유고 연방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던 세르비아 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때 화력이 우세했던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민족우월주위를 바탕으로 수많은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특히 스레브레니차 지역에 살고 있던 25,000~30,000명의 주민들을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끔찍하게 학살하는데 어른, 아이, 남자, 여자, 심지어 임산부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이 사건으로 NATO가 개입하게 되고 세르비아 세력을 압박한다.


이렇게 저렇게 치이고 전쟁통에 죽어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폭포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여전히 눈부시게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욕망, 사회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따위의 이념들……. 이런 것들이 고요하고 맑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덧없이 느껴졌다. 


나이 들면 자연이 더 좋아진다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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