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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6. 2023

요정의 나라로 초대



크로아티아에 있을 때, 옐레나가 말해준 크르카 국립공원 (Krka National Park)에 갔다가 근처의 시베니크(Sibenik)이라는 도시에도 가보기로 했다. 크르카 국립공원은 시베니크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차로 15분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고 시베니크 역시 우리 숙소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 불편했기 때문에 차를 렌트해서 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이미 플리트비체에 가려고 차를 빌렸기 때문에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크르카 국립공원은 1985년 크로아티아에서 7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청록색의 16개 호수와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크로아티아에서 플리트비체에 버금가게 유명하다. 

국립공원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료를 샀는데, 매표원이 주차장에서 국립공원이 시작하는 곳까지 4km나 떨어져 있으니 차를 가지고 내려가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구불구불한 산비탈을 천천히 내려가 공원이 시작하는 입구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 차를 주차하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였다. 국립공원 직원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좁은 흙길 가에 겨우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통나무로 만든 트레일 코스가 보였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크고 작은 호수 사이로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어서 이곳을 걷는데 마치 내가 숲 속 한가운데 물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길 바로 옆에선 오리와 백조들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다녔고 낮은 수면 아래로 수많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지상은 이제 막 봄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 대지를 뚫고 나온 햇 초록색 빛의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윌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보다 크르카 국립공원이 더 좋다고 했다. 통나무 다리로 만들어진 길이 끝나자 흙바닥의 산길이 나왔고 어느 순간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타났다. 집들은 매우 작았고 집 앞에 크고 작은 물레방아가 있었다. 예전엔 폭포의 힘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사용하던 마을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박물관과 기념품 가게로 쓰이고 있었다. 숲 속에 돌연히 나타난 마을이 이곳의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나는 요정들이 사는 마을에 몰래 침입해 들어온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말고는 이곳을 더 잘 설명할 길이 없다. 전쟁이라는 걸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요정 마을.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면 커다란 폭포가 하나 나온다. 스크라딘스키 폭포 (Skradinski Buk)이다. 플리트 비체보다 낮지만 35미터가량 몇 단계를 이루며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에메랄드빛 호수가 있다.



 이 맑고 아름다운 폭포의 물이 강물로 이어지고 다시 아드리아해 바다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구글로 본 적이 있었다. 라오스의 꽝시 폭포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이 폭포에 뛰어들 생각을 하니 여름에 와도 좋긴 하겠지만, 한 외국인 유튜버 말로는 여름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이 관광하기는 더 적기인 것 같았다. 비수기라 입장료도 저렴하고 말이다. 우리 앞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크로아티아 연인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니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참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이다. 요정의 정기를 받아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크르카 폭포를 떠나 우리는 시베니크로 향했다. 시베니크(Sibenik)는 크로아티아 중부에 달마티아 지방의 유서 깊은 해안 도시로 행정, 교육, 산업, 교통, 관광의 중심지라고 한다. 나는 사실 이곳이 왕좌의 게임 촬영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다. 바로 드라마 속 도시인 브라보스와 아이언뱅크가 촬영된 곳이기 때문이다. 브라보스(Braavos)는 드라마 속에서 9개의 자유 도시중 하나이고 좁은 바다를 건너 웨스트로스 동쪽에 위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는 브라보스 도시로 들어오는 입구 두 섬에 다리를 걸친 채 창과 방패를 든 거인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당연히 시베니크에서 그런 동상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시베니크 항구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후 보이는 도시 전경


크로아티아 대부분 도시가 고대 로마인이나 베네치아 인들이 건설했지만 시베니크는 크로아티아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구 4만 정도 작은 도시지만,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자존심과 같은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11세기부터 다양한 나라에 지배당한다. 베네치아, 비잔티움, 헝가리 다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쭉 점령당해 오다가 1921년에 다시 이탈리아공화국, 제2차 세계대전엔 독일과 이탈리아에 점령당하고 최근 들어 1944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하게 되고 1995년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크로아티아로 속하게 된다. 

Burger Bar Plutos 레스토랑의 수제햄버거


우리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 쪽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배가 고파서 일단 밥부터 먹고 관광을 시작하기로 했다. 근처에 구글로 평점이 좋은 수제 햄버거집을 찾아들어가 햄버거를 주문했다. 육즙이 가득한 두툼한 패티에 신선한 야채와 말랑말랑한 빵의 조합이 일품이었다. 역시 후기의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성 미카엘(St. Michael’s Fortress) 요새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로 했다. 


성 미카엘 요새 가는 길


성 미카엘 요새는 는 15세기 초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때 만들어졌고 요즘은 요새의 야외무대에서 많은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요새 입구에 매표소가 나타났다. 요새에 발도 들이지 않았지만 이미 매표소에서부터 경치가 빼어났다. 


성 미카엘 요새 입구에서 경치


늠름하게 우뚝 서 있는 요새 절벽 아래로는 적들의 배가 오는 것을 훤히 볼 수 있는 바다가 길쭉하게 펼쳐져 있고 뒤쪽 산으로는 주민들이 사는 주홍색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요새에 입장해서 젤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는데 이곳에는 로마 극장 스타일로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부채꼴 계단식 야외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가장 높은 곳에 크로아티아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성 미카엘 요새 뒤쪽 마을의 모습


우리는 요새의 성곽을 빙 둘러 산책하며 경치를 감상했다. 그리고 내려갈 때는 올라왔을 때와 반대쪽으로 난 길로 내려가 보았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을 통해 마을과 이어져 있었다. 이 골목길들도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처럼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다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낡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건물의 집집마다 1층, 2층에  꽃이나 식물을 가꾸고, 빨래를 바깥쪽으로 널어놓았다. 문화유산 급 골목길 속에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반질반질 윤이나는 대리석의 좁은 골목


미로 같은 좁은 길을 따라 점차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동굴같이 이어진 골목을 지나는데 여기만 지나면  탁 트인 광장과 하얀색 커다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성 제임스 대성당(The Cathedral of St. James)이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 성당이 보일 때, 골목에 내가 서 있는 지대가 높아 성당을 아래로 내려다보기 때문에 큰 성당 건물이 전체적으로 한눈에 보이게 되는데 마치 슬로비디오 틀어주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감동적이다. 


시베니크 성 제임스 성당(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


성 제임스 대성당은 1536년에 완공되었고 19세기 중반에 보수공사를 했는데 르네상스식 건축물 중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성 제임스 성당 밖으로는 넓은 광장을 건물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그중 구시청사 건물이 있었다. 지금 1층은 레스토랑인 듯 많은 카페 테이블과 의자들이 밖으로 나와 있었고 밖에 테라스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구시청사 건물 1층 디자인이 매우 독특했는데 여러 개의 균일하게 배열된 기둥이 아치형으로 2층 건물을 받치고 있었고 복도처럼 연결된 이 테라스형 구조 때문에 분위기가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르네상스 양식의 아치 테라스에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생활화된 이곳 주민들이 나에겐 참 신비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텅 빈 성당에 그림과 조각상이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단 한 명의 청소하시는 분만 계셨다. 그분께서 아기들 세례 받는 곳이 성당 안에 있으니 가서 보라고 권해 주셨다. 성당 안쪽에 들어가니 사람 대여섯 명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컴컴하고 비밀스러운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방 중간에 돌로 만들어진 분수대 같은 놓여 있었고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어두운 방의 분위기를 밝히며 오묘하게 비추고 있었다. 종교적 건축물들은 이렇게 빛을 잘 이용하는 것 같다.


성 제임스 성당 세례실


성당 맞은편에는 성 제임스 성당을 건축한 유라이 달마티나츠(Juraj Dalmtinac) 동상이 있고 아래쪽으로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작은 해안가 항구를 따라 많은 카페가 늘어서 있다. 주차장으로 가기 전 우리는 그 카페 중 하나에 들어가 파티오에 앉아서 화이트 와인 한잔을 주문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오늘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해 보았다. 


시베니크 항구쪽 카페거리


평일이라 한적하고 조용했는데 이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카페 앞 항구에서 보트를 정박시키는 배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 작은 도시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대와 현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하는데 현대와 판타지도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크르카 국립공원에 사는 요정들도 지금 내가 와인을 마시는 곳에 와서 와인을 한잔하고 가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마시는 와인을 요정들이 만들어서 이곳에 파는 상상도 해보았다. 성 야곱 성당 앞 광장에 있는 테라스 커피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현대 사람들과 요정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생물체들이 커피도 마시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 보았다. 판타지 소설이나 드라마가 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이런 환경에 살다 보면 상상하는 것조차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가끔 그곳으로 간다. 누군가 요정의 나라로 가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여주고 싶다.

“몰랐어? 비밀인데 요정이 사는 나라가 실제로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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