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래블 소피아 Nov 15. 2023

고양이가 지킨 마을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지만 코토르의 경치는 하나는 끝내준다. 오랜 역사와 함께 고즈넉한 중세 항구도시 모습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1979년 코토르 자연 역사 문화지구라는 이름으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유럽 동남부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다. 물가도 저렴하고 도시도 귀엽고,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아마 저평가된 여행지가 아닌가 싶다.


 

코토르 구시가지 뒤편으로 높은 산이 있는데 산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길이 4km의 성벽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 마을 전체의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하루는 이 성벽에 오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성벽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던 중 성벽을 오르는 입장료가 8유로인데, 입장료를 내지 않고 입장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 외국인 블로거가 올린 글을 찾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보통 본인이 여행할 때 입장료를 내는 것은 그 관광지를 지원하고 보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대체로 입장료를 내고 다니는 편인데, 코토르 성벽 입장료 수입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했다. 가난한 여행자인 우리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성벽을 지키기 위해 정말 쓰이는지 아니면 누구의 주머니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가는 것을 정당화해 놓은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믿어보기로 하고 그 블로거가 말해준 경로를 따라 성벽의 뒷구멍으로 입장하기로 했다. 구시가의 입구를 지나쳐 걷다 보면 제법 큰 마트가 있는 쇼핑몰 빌딩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 뒤편에 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이 하나가 있다. 이 등산로 입구를 통해 올라가면 코토르 성벽의 정상과 이어지기 때문에 이 등산로가 바로 입장료를 내지 않는 길이었다. 

우리는 산을 따라 길이 지그재그로 나 있는 완만한 경사로 산을 올랐다. 걷는 내내 작아지는 마을의 주홍색 지붕들을 보며 수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30~40분 올랐을까? 정상처럼 보이는 곳에 성벽이 있었고 성벽 창문의 어느 구멍에 사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우린 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성벽으로 다가간 후 그 개구멍같이 조그맣게 나 있던 성벽 창문으로 기어들어 갔다. 우리 뒤를 이어 우리와 같이 비밀스러운 통로를 알아낸 유럽 관광객으로 보이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히죽 웃으며 사다리에 올랐다. 

 

코토르 성벽 비밀통로


 우리는 몬테네그로 국기가 휘날리는 산 정상까지 올라가 코토르 전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구시가지의 주홍색 지붕들이 내려다보이고 검푸른 산에 둘러싸인 파란 바다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는 가까이서 봤을 때 짙푸른 청색이었는데 높은 곳에서 햇볕에 비치는 모습을 보니 좀 더 밝고 영롱한 푸른빛을 띠었다. 그림 같은 경치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탁 트였다. 나중에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해발 280미터에 있는 산 조반니 성(Castle of San Giovanni)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산할 때는 성벽을 따라 내려오기로 했는데 1,350 계단을 내려갔다. 성벽을 다 내려오니 길이 바로 코토르 구시가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코토르 구시가는 기원전 1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시가의 입구는 여러 개인데 지금은 우리가 성벽과 연결된 입구로 내려왔지만, 보통은 코토르 만 쪽으로나 있는 시게이트(Sea Gate)가 있는 곳이 가장 유명한 입구이다. 

 

 

코토르 구시가지의 팔의 광장

그 시게이트를 지나면 4층 정도 건물 높이로 1602년에 지어진 시계탑이 보이는 팔의 광장(Square of Arms)이 나타난다. 코토르 구시가지는 뒤로는 산, 앞으로 바다가 있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천의 요새로 그 안에 여러 비잔틴 가문의 저택과 교회들, 작은 광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네 번에 큰 지진이 있어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무너졌고 그래도 남아있는 중세의 건물들, 그리고 근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당(Orthodox Church of St Nicholas)에 한 번 들어가 보았다. 19세기에 지어졌던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고 1909년에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성당 정문에 세르비아 국기가 걸려 있었다. 

왼쪽이 성 니콜라스 성당 외부와 내부, 오른쪽이 성 루카스성당 내부


성 니콜라스 성당 맞은편에는 12세기말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의 성 루카스 성당(St Lucas’s )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에 여러  건물에 둘러싸인 성 트리폰 (Staint Tryphon) 성당이 나타난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양식으로 만들어졌고 두 개의 종탑에 처음 건축된 연도인 1166, 마지막으로 복구한 년도인 2016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 

나는 성당들 내부를 둘러보며 서유럽 쪽에 있던 성당과는 달리 예수님상이나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조각품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리스 정교회 성당에는 성상 숭배 금지(조각상 숭배 금지)라는 조항 때문에 조각상을 배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는 조각상 대신 거대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구시가의 건물들 1층은 대부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으로 쓰이고 있었고 골목골목을 누비다 보면 고양이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곳곳에 나타났다. 구시가지 길거리에 고양이들이 엄청 많이 돌아다녔다. 

코토르 구시가지의 고양이들

  

고양이를 안 그래도 좋아하는데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생각나서 선물을 사 주려고 한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고 너무 궁금해서 그곳 기념품을 파는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곳곳에 판매되고 있는 고양이 기념품들

 

“코토르 구시가지 곳곳에 왜 고양이와 관련된 기념품이 이렇게 많은 거죠? “

그러자 직원이 대답했다.

14세기~16세기 유럽은 흑사병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어요. 병이 돌면 많은 사람이 마을을 버리고 떠나기도 했죠. 하지만 우리 마을은 병균을 옮기는 쥐들을 고양이들이 다 잡아먹어서 흑사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켰답니다. 그 이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를 보호하고 있어요.”

 

페스트 혹은 흑사병이라 불리는 병은 쥐에 있는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1급 감염병이다.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에게 기생하는 벼룩이 쥐의 피를 빨아먹고 사람에게 옮겨 감염된다. 2~6일의 잠복기를 가진 후 발열, 근육통, 관절통, 두통 등 증상이 나타나고 24시간 이내 국소 림프샘 부위 통증이 발생한다. 초기에 항생제를 투여하여 치료하면 생존 확률이 있지만 진단이 늦어질 경우 패혈증으로 진행, 장기부전,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1346년~1353년 유라시아 서부 일대를 휩쓸면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인구의 30%에 달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 발생하였다고 한다. 1300년대 열악했던 의료시설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병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인가. 차라리 병을 옮기는 균을 먹어 치우는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다. 

 

고양이라는 동물은 나라별로 다양한 의미가 있는 동물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성한 상징으로 숭배받았고 중국에서는 고양이의 힘을 빌려 다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일본에서는 재물을 부르는 부적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요물’로 통하며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양이의 관절이 유연해 그 고기를 먹으면 관절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퍼져 잡아먹기도 한다.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스위스에서도 고양이 고기를 먹는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삵이 고양이로 진화했다고 한다. 살쾡이와 인간의 공존은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서아시아의 고양이들은 기원전 7500년경에 인간과 공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반도에는 우리 고대국가인 부여에 살쾡이 가죽이 특산물이었다는 중국 [후한서]에 자료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삵은 반려동물이 아니라 사냥당하는 동물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고양이는 중국에서 많이 키웠는데 중국의 고양이가 해양선을 타고 신라, 일본으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넘어왔을 거라고 한다. 이 시기 중국에서 넘어왔다면 귀족들이 중국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는 사랑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서도 고양이를 기르고 번식했던 모습이 많은 자료로 남아있으며 재산을 불러오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왜 요물이 되었을까? 조선 후기에 고양이 개체수가 증가하고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면서 창고의 쌀을 갉아먹는 쥐를 잡아주는 고양이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줄어들었다. 쌀이 귀중한 노동의 산물이자 생계였던 농촌에서와 달리 도시에서 돈을 주고 사면되는 상품이었으니까. 그리고 개항기에 이르면 도둑을 넘어 요물이자 괴물로 인식된다. 비교적 최근에 요물로 인식되어서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할머니 할어버지들에게 고양이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한다.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참조)

 

 코토르에서는 요물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소중한 동물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귀여워서 좋아하는걸 둘째치고 정말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병을 옮기는 쥐 나 바퀴벌레 등을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렇게 고양이가 지켜낸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없는 길고양이들을 만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세 마리의 길고양이들이 우리를 따라왔다.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보호를 받아서 그런지 이 녀석들은 사람을 보고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졸졸 따라온다. 그들을 보며 잠시 멈춰 섰더니 우리 다리 사이를 요리조리 비비적거리며 심장이 멎을 만큼 귀여운 애교를 떤다. 이대로라면 발걸음이 얼어붙어 숙소로 돌아갈 수가 없다. 우린 아쉽게 귀여운 고양이들에게 인사를 나눈 뒤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어둑해진 해질녘 야외 테라스로 나와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해질녘 브랭코의 집 테라스

 

그런데 때마침 또 다른 길고양이가 브랭코의 집에 침입해 들어와 야외 테라스 소파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옹’하며 종아리 사이를 비비적거려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소파로 껑충 뛰어올라 무방비 상태인 나의 배 위로 올라가 털썩 앉아버렸다. 그는 내 배가 편안한지 눈을 스르르 감더니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숨 쉴 때마다 고양이가 배 위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이 뿜어내는 따뜻하게 체온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 순간 정말로 희한하게 작은 생명체와 내가 체온과 호흡을 나누는 행위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기 때문에 사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 길고양이가 내 배 위에서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이 순간 얼어붙었던 심장이 와르르 녹아내렸다. 지구에서 사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일깨워주며 ‘생명체’의 존귀함을 깨우쳐 주었고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구나…….' 

 

이 예쁜 고양이들이 눈에 밟혀서 또 어떻게 다음 여행지로 이동을 해야 하나. 애교쟁이에게 홀딱 마음을 빼앗긴 그날 밤 윌과 나는 심각하게 고양이를 길러야 할지 의논하면서 잠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으로 사는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