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튀르키예에 괜찮은 재즈바가 있다고 해서 소개해 줬다. 나는 재즈, 하우스, 테크노, 힙합, 클래식 등 음악을 편식하지 않고 대체로 골고루 즐기는 편인데 마침 독일에 재즈클럽과 비교도 해 볼 겸 이스탄불의 재즈바 분위기가 궁금하기도 해서 홈페이지로 예약했다. 그 재즈바는 갈라타 타워 근처에 있는 나디스 재즈 클럽(Nardis jazz club)라고 하는 곳이었다. 마침 갈라타 타워 쪽으로 가본 적이 없어서 저녁 8시 공연이었지만 조금 일찍 주변에 도착해서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갈라타 타워에 도착하니 그곳을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줄이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었고 주변으로도 골목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타워 위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냥 주변 골목을 돌아다니며 상점들을 기웃거리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 골목에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피자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라타 타워 앞에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차이를 한잔 마시면서 예약된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재즈클럽으로 입장했다. 재즈클럽은 꽤 아담했고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무대가 뻥 뚫려 2층에서도 무대를 내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조금 일찍 와서 자리를 먼저 맡을 수 있었다. 비어있는 테이블들을 두리번거리고 2층까지 올라갔다 와서야 다시 1층의 자리가 좋아 보여 무대 바로 앞에 신중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내 앞으로 침이 마구 튈 것같이 가까운 거리이다. 무대뿐 아니라 우리 옆에 테이블은 거의 우리와 붙어있다시피 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고 공연은 아주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독일에 재즈클럽이 스윙재즈 느낌이었다면 이곳에 공연은 비밥 재즈에 가까웠다. 드럼, 전자기타, 첼로, 피아노, 트럼펫 연주자가 있었고 터키 가수 한 분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셨다.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에 게스트로 나온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 님에 따르면 재즈는 1920년대 댄스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던 형식적인 음악에 불만을 가진 연주자들이 모여들었고 음악으로 싸움하듯 Jam을 하면서 재즈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스윙재즈가 유행했고 1940년대~50년대 비밥 재즈, 다음에 하드 재즈나 퓨전재즈로 넘어가게 되었다. 비밥 재즈란 4~5명의 소규모 편성으로 구성되었고 색소폰이나 피아노를 솔로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즉흥연주를 좀 더 과감하게 하기 시작 한 재즈이다. 연주 형태로 보면 테마 멜로디 연주를 한번 하고 변주 멜로디로 즉흥 연주를 하는데 악기 연주자들이 돌아가면서 즉흥으로 연주를 한다. 나도 잘 알진 못하지만 이스탄불에서 본 재즈는 중간에 가수가 노래를 하고 연주자들이 합주를 하다가 반주가 나오는 타이밍에 변주를 시작하여 각 악기당 한 명씩 솜씨를 발휘하며 무대를 장악했다. 이런 걸 비밥이라고 하는 것인가 짐작했다.
차분하게 연주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다가 옆에 앉은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치게 되면서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다.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독일에서 왔다고 했다. 한 명은 세르비안인, 한 명은 독일인, 또 한 명은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다. 직업도 다들 전문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 명은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엔지니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의사인가 변호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그들과 수다를 떨다가 윌과 나는 그 세 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 세명 중 둘이 본인들의 결혼식 이야기를 하길래 그들이 커플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는데 다른 한 명이 어느 쪽의 친구인지 몰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 세 명이 함께 살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들은 룸메이트가 아니라 다자간 연애 관계(Polyamory)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세 명 모두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서로서로 성관계도 하면서 부부처럼 함께 산다는 말이다. 와…… 너무 신기했다. 나는 마치 꺼내 보면 안 되는 상자 뚜껑을 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은밀한 이야기는 재미있는 법, 그들에게 빠져들어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재즈 연주가 끝났고 윌은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재즈 연주가 끝나면 어디 갈 거야?”
“우린 이곳을 나가면 게이클럽에 갈 거야.”
“게이클럽? 이스탄불에 게이클럽이 있다고? 우리 같이 가봐도 돼?”
“그럼, 같이 가자!”
윌은 이스탄불의 게이클럽이라는 신비스러운 탐험에 신이 나서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간절함을 담아 쏜 레이저 눈빛을 받고 얼떨결에 알겠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서 게이클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도 없었지만, 호기심도 별로 없었고 갈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나도 갑자기 너무 궁금한 거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지. 그래서 합류했다. 배가 고파서 소스를 듬뿍 얹어주는 찐 감자 간식을 먹으러 같이 가서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먹고 한 10~15분 정도 걸어갔는데 낯선 곳에서 그들의 꽁무니만 쫄래쫄래 따라갔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시 그 클럽을 찾아보라고 하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게이클럽에 도착하자 문 앞에 있던 보안요원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선 나에게 물었다.
“너, 여기 게이클럽이란 거 알고 입장하는 거지?”
“응.”
나는 덩치가 큰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몸수색을 마친 후 클럽으로 입장했다. ‘섹스 앤 더시티’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 캘리가 게이클럽에 갔을 때 그곳은 남녀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이스탄불의 게이 클럽은 손님들이 모두 남자였다. 군데군데 무대 위에 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몸매가 조각상 같은 친구들이 그 위에서 중요 부위에 작고 얇은 천조각 하나만 걸치고 춤을 추고 있었다.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에 내가 실제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클럽은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생겼고 오른쪽으로 바가 있었다. 독일에서 온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클럽 깊숙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독일 친구들 세 명 모두 몸매도 좋고 다 잘생겼다. 그래서 그들이 오자마자 여기저기서 그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세 명 중 한 명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하자 다른 두 명은 그것을 질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고 둘이 춤을 추었다. 그 셋을 지켜보는 것도 참 흥미로웠다.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런지 ‘왜 여자가 이런 곳에 와서 성가시게 난리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나를 향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클럽에 온 사람들은 집에서 운동만 하는지 다들 덩치가 크고 어깨가 산 만했다. 바가 있는 쪽으로 술을 주문하러 가려면 이 덩치들에게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근육질의 탄탄한 어깨 틈 사이를 비집고, 아니 뚫고 가야 하는데 한번 바에 도달하면 진이 쭉 빠질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서 술 한 잔만 마시고 우린 바로 클럽을 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세 사람이 마음껏 사랑하며 함께 사는 관계가 지구상 어딘가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것과, 동성을 사랑한다는 행위에 대한 혐오가 심한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나라 튀르키예에 게이클럽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만남 이후로 지금 시대를 지배하는 일부 일처제의 혼인형태와 성소수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선 원시시대에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 여성과 많은 남성들이 결합하여 아버지를 알 수 없이 아이가 많이 나오고 오직 어머니만 알 수 있는 모계 위주 사회구조가 있었다고 한다. 후에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결합으로 이어졌는데 이때는 남자 쪽에서 강제로 행하는 강혼, 겁탈혼, 혹은 약탈혼 위주였다.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일부일처제 혹은 남자의 부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여러 여자와 혼인하는 일부다처제 형식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첩제를 허용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인 1920년 근대 법률이 도입되면서 1,920~1,930대까지 일본 가정법인 일부일처제가 한국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일부일처제가 도입된 것은 겨우 100년 정도 된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을 무마하고 무너진 가정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간통죄가 생기지만 늘어나는 이혼의 원인으로 확대되어 2015년, 간통죄는 폐지된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참조)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60년 평생 함께 산다고 했을 때 다른 이성에 대해 감정이 생기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 다른 여자가 좋다고 나에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아니면 내가 다른 남자가 좋아지면 어떡하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면 이혼하면 되겠지만 둘 다 좋아지면 어떡하나? 이럴 때 주변에서 받게 될 비판도 무섭지만, 사랑하는 남편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 때문에 엄청난 자괴감이 들 것 같다. 결국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행위는 ‘순간에 욕망’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그 행위가 가져다줄 감당하지 못할 무게로 나 자신을 짓누르고 결국 파멸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때문에 시작할 수도 없고 혹시나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일부일처제라는 법이 있기 때문에 그런가?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 법이 없더라도 인간에게는 질투심이 있다. 일부일처제가 사라졌다고 가정하고 내가 남편과 함께 살면서 나도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내 남편도 자유롭게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내 눈앞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나는 태연할 수 있을까? 나는 튀르키예에서 만난 세 명이서 함께 산다는 이 친구들이 너무 신기했다.
뉴욕에 갔을 때 브루클린의 어느 책방에 가서 서점에 꽂혀있는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more than two’(둘 이상). 이스탄불 재즈클럽에서 만난 그 친구들과 같이 두 명 이상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나 보다.
그리고 이슬람국가인 튀르키예에 게이클럽이 있다는 것이 또 믿기지 않았다. 엄청난 차별을 받으며 꽁꽁 숨어 지낼 것만 같았는데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종교에서도 동성애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로마 가톨릭은 현재도 같은 성끼리 사랑하는 행위를 ‘죄’로 규정짓고 동성결혼, 동성 커플의 입양권등 모두 반대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성소수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데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는 나라가 모두 12개국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살 떨리게 무서운 율법을 가진 이슬람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태어날 때 우리가 받은 성별로 정체성을 가지고 살면서 나와 다른 성별의 배우자를 선택할 때만 정상, 혹은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몇몇 국가의 도시들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고대부터 내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든지, 나와 같은 동성에 감정적으로 끌리고 사랑한다든지, 나와 같은 동성과 이성 모두 사랑한다든지 하는 현상은 인간 사회에 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회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 사회가 그렇다.
그리스 신화는 동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것을 넘어서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남자아이와 사랑을 하는 행위도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아동 성 학대 혹은 아동 성폭행으로 사람들이 펄쩍펄쩍 뛰었을 텐데 말이다. 김헌 교수님의 그리스 로마신화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나이 많은 남자가 미소년을 곁에 두는 일을 명예로 여겼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당대 최고 미남으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를 곁에 두고 철학적 담론을 즐겼다. 이런 식으로 젊은이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남성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일은 하나의 교육적 전통이기도 했고 나이 든 남성은 젊은 청년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 패기에 호응하며 삶의 의욕과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책에서 교수님은 이런 관계를 단순히 남색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엔 이런 사회였다면 동성애자들이 넘쳐났을 것 같다. 나이 든 남성을 어디까지 모셨는지도 모호하고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은 인간사회가 존재할 때부터 있어 왔었고 한때는 동성을 사랑하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도 있었고 그런 시기도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최근 2000년간은 많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차별받아 왔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 몇몇 사회는 그들도 같은 사람이고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있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회도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난 편이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억압하는 불평등한 사회도 많고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아직도 많은 성 소수자들은 법적 차별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난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나 폭력 피해 등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한국만 해도 그렇다. 은근히 차별이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나라다. 한국에서 2000년 9월 26일 코미디언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하고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홍석천 씨는 한동안 모든 방송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거의 10년 정도 지난 후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면서 다시 방송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지금은 시간이 더 많이 흘렀고 성소수자들의 인식이 더 나아진 것 같지만, 부모님에게 갑자기 ‘저는 동성이 더 좋아요.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면 부모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반대로 내 자녀가 이렇게 나에게 말한다면 우리는 너그럽게 웃으며 ‘그래 그 친구 집으로 한번 데려와 보렴, 식사라도 함께 같이 하자!' 이렇게 맞이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누구라도 내 자식만은 성소수자가 아니길 바랄 것 같다. 만약 그런 사실이 드러났다고 해도 아니라고 부정할 것 같다. 내 자식이 ‘성소수자’로서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고통받으며 살게 될 상황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내 자식이 성소수자가 되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받게 될 시선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인지하면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로 많이 이민을 하는 것 같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는 있는 현대 사회에서조차도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다른 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죄인이 될 일인가? 시대는 항상 변하고 사회적 가치도 변한다. 인류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 아이를 많이 생산해야 할 시대에 동성을 좋아하는 행위는 환영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성 간의 성행위로 치명적인 병균을 옮기고 다녔던 시대라면 또 환영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인구는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선진국 저출산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인구비율을 과거와 따져 봤을 때 인구는 많아서 문제다. 인구 번영이나 노동력에 대한 걱정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위생이나 질병 관리도 수준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그들을 멸시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들도 성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뿐 그냥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똑같이 인격적으로 대우받을 인간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본인들이 좋다고 하는 사람과 사랑할 수 있게, 사랑받을 수 있게 조금 더 관대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