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몹시 궁금하였지만, 선뜻 여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유는 그 땅이 매우 방대하여 휴가를 좀 길게 내고 가야 만족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미루고 미뤄둔 참이었고, 딱 지금 시간이 맞아떨어져 드디어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내가 튀르키예에 대해 정작 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의 나라’ 정도의 단어만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에 맞붙었던 튀르키예가 승리하고 우리나라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 응원단들이 열기로 가득한 월드컵 경기장에서 그들의 국기를 펼쳐 흔들어 주었고 그 강렬했던 이미지 하나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실제로 이날 축구 중계를 본 터키 국민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동하여 그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터키에 여행을 가면 아주 잘 대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여행할 국가에 대한 역사와 현재 국가 상황 정도는 알고 방문해야 할 것 같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엔 뭐가 그렇게 지루했는지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안 자는 척 요령을 피우며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역사 공부가 참 재미있다. 여행이 좋아 다른 나라를 다니다 보니 그 나라의 사람들이 왜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여 그 나라의 뿌리부터 공부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지를 다녀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윗세대 상황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지만 내가 최근 역사적 배경을 잘 몰라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했다. 사람들과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근대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이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요즘은 공부할 수 있는 매체가 매우 다양하여 예전보다 훨씬 더 재밌는 것 같다.
방대한 튀르키예 역사를 어떻게 다 나열하겠냐 만은 요약하자면, 1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한 오스만 제국 위에 아타튀르크(아버지)로 잘 알려진 무스타파 케말 파샤 장군이 이슬람 색채를 지워버린 터키 공화국을 만들었는데 지금 에르도안 대통령은 슬슬 이슬람주의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근대 역사의 골자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터키 공화국 탄생과 더불어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개혁한 이후 누려왔던 자유가 이슬람주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점점 옥좨오고 있다는 것이다. 케말 장군이 시행한 개혁 정치의 예를 들면 술탄제를 폐지하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1926년에는 오랜 이슬람교 율법인 샤리아(Sharia)를 폐지하였고, 1928년에는 아랍 문자 대신 알파벳 사용하였으며 여성 교육과 근대 교육 정착 등에 힘을 썼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지금도 터키 국민들의 마음속에 국민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전 국토를 여행하는 내내 국민들 마음 깊은 곳에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우리나라 해변에 가면 그 해변의 명칭이나 그 지역 이름이 조형물로 만들어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스폿으로 꾸며 놓은 경우가 흔히 있는데 터키의 체쉬메라는 지역의 한 해변에는 ‘아타튀르크’라는 전 대통령 이름 조형물이 설치가 되어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현재는 마음껏 자유를 누려왔던 튀르키예 국민들이 빡빡한 율법을 가진 이슬람주의로 돌아가려는 정책으로 인해 점점 억압이 심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도 높은 실정이었다.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판하면 감옥에 갈 정도로 탄압이 심하다. 튀르키예를 여행할 때 정부를 비판하는듯한 말을 삼가는 것이 좋다. 마치 우리나라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보는 듯했다.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괜찮아. 내년에 선거가 있으니, 대통령이 꼭 바뀌고 말 꺼야.’라고 말하며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시리아 난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었는데 과연 대통령이 쉽게 바뀔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이 이유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내 예상대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난민 협회에 따르면 2022년 4월 기준으로 튀르키예는 3,762,385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대구 인구가 237만 명 정도 되는데 300만 명이 넘는 수를 받아들였으니, 거의 거대한 도시 하나를 모두 흡수한 상황이다. 대부분 시리아인 난민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도시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인구는 밀려들어 오는데 그들을 위한 튀르키예 정부는 그리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형편이라고 느꼈다.
시리아인들은 시리아인들대로 불편하고, 또 튀르키예 사람들은 그들대로 고민이 많다. 예를 들어 캐나다의 경우 이민을 받아 줄 때 범죄 기록도 보고, 교육 상황도 보고, 재정 상태도 보고 그리고 영어 실력까지 보고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서 받아주는데 ‘난민’의 경우 이 사람이 범죄 경력이 있는지, 교육은 제대로 받았는지 언어는 통하는지 뭐 하나 제대로 보고 받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테러리스트들이나 범죄가 있는 사람들도 휩쓸려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말인즉슨 튀르키예 사람들의 안전이 위협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난민 문제는 참 쉽지 않다.
하루는 시리아 저널리스트와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점심을 먹는 자리에 시리아 난민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구걸을 해왔다. 나는 전공이 관광경영학인데 공부할 때 관광의 부작용으로 구걸하는 어린이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매우 낮은 국가로 여행 갈 때 관광객에게 구걸하는 어린이들에게 1달러를 쥐여주면 당장은 행복할 수 있으나 그것이 그들의 장기적인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 때문에 나는 우리 쪽으로 내민 그 어린아이의 쭈뼛한 손을 못 본 체 했지만, 시리안 저널리스트는 주머니를 쓱 한번 뒤지더니 나오는 동전 몇 푼을 쥐어줘서 돌려보냈다. 본인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못 본 체하기가 좀 그렇다고 했다. 튀르키예 정부에서 어려운 상황에 시리아인들을 받아 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렇게 도시로 밀려 들어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난민들이 많이 있었고 이 친구는 그런 시리아 난민들이 안타까워 취재를 많이 했던 모양이었다. 취업비자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정들이 수두룩하고, 이런 가정들은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에 갈만한 어린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고 대신 아이들을 일터로 내몰거나 구걸을 하게 거리로 내보낸다고 했다. 당장 구걸해서 번 돈을 집으로 가져가면 가족들이 끼니를 때우고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교육을 잘 받지 못하고 자라난 그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가꾸어갈 그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후 튀르키예를 여행할 때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불쑥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맨손으로 구걸하는 어린이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휴지라도 하나 들고 오는 아이들은 물건을 사주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