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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빈아 Dec 10. 2022

충격! 착한 척하지마(1)

중고 막내의 혼란

[충격! 착한 척하지 마]
- 부제: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의 삶 -

중고 막내의 혼란

‘착한 척... 하지 말라고?’

충격이었다. 얼굴 모든 근육이 제자리를 찾아가 멈추는 느낌. 숨을 길게 내쉬면서 어깨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말려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몸만은 차분한 상태 같았다. 지금도 그 공간에서 내가 앉아 있는 모양, 내가 바라보는 사무실 내부, 그 안의 공기마저 생생하다.


일을 하면서 듣게 될 거란 생각도 못 했지만, 그것도 팀장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녕, 말로도 사람을 때릴 수 있다. 입사 후 지금까지 내 멘탈을 산산조각 낸 리스트를 세운다면, 그의 말은 단연 상위 랭킹에서 1, 2위를 다툰다. 참고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양대 산맥의 다른 하나는 ‘내가 온실 속 화초일까?’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 혼란이다.


이야기는 첫 애뉴얼 리포트 작업에서부터 시작됐다.

인쇄 과정에서 실수한 날, 이성적인 선배에게 도움을 받았던 바로 그 시기와 맞물린다. 엄밀히 따지면 약간 더 이전인 시안 수정 작업 때 일어났다. 말했다시피 우리의 리더는 내가 내민 시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디자인이 너무 심플하고 원고 내용과 동떨어진다고 단정했는데, 이 말은 곧 ‘디자인 전폭 수정 필요’를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애써 잡아둔 레이아웃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수정해온 의미가 사라질뿐더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략적인 수정이 이미 끝난 상태라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도 못한 상황이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작업을 도와주는 사업 파트너인 디자이너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게 싫었다. 내용에서 책잡히지 않으려고 원고작업에 시간을 꽤 써둔 터라 발행 일자를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도 됐다. ‘이건 내 일인데, 내 눈에 예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담당자 의견이 우선 반영되지 않는가에 대해 화도 났다. 어렵게만 생각하느라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몸이 비비 꼬일 정도로 부끄럽지만, 신입 시절엔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꼭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싫은 소리 해서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때는 정말 그런 일이 싫었다. 어떻게 하면 디자이너가 기분 상하지 않게 말을 잘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장문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내용은 리더의 의견을 전폭 반영한 디자인 수정 요청 건이었다. 일은 여기서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단어 선택을 지나치게 조심한 것이 화근이 됐다. 좋은 말만 골라서 쓰느라 디자이너에게 의견이 두루뭉술하게 전달된 거다. 당연히 요청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수정 시안이 돌아왔다.


  ‘큰일 났다. 어찌해야 하나.’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내 뒷모습을 본 팀장님이 경과를 물었다.


“왜 패닉이야. 상황이 어떤데?”

“아, 시안에 수정 요청한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어요.”

“(잠시 침묵) 네가 원하는 방향을 잘 전달한 게 맞아?”

“아, 제 생각엔 제대로 요청한 것 같은데. 말이 너무 두루뭉술했던 것 같아요. 혹시 디자이너 선생님이 제대로 이해 안 되게 말한 걸까요? (이하 애송이 같은 말 생략….)”


팀장님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더니 다시 짧게 침묵했다. 곧이어 이 메시지만으로는 디자이너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거기다 대고 나는 이것보다 센 단어를 쓰면 디자이너가 기분이 나쁘지 않겠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내 말을 들은 팀장님이 아주 낮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 착한 척하지 마.”

“…?”

“네가 착한 척하면서 가운데에서 일 못 하고 있으면 결국 파트너를 더 힘들게 하는 꼴이 되는 거야. 착하고 예쁘게? 말하는 거 좋지. 근데 그래 봤자 도움 되는 거 없어.”

“….”

“착한 척 그만해. 정확하게 전달해야 파트너도 쉬워. 네가 진짜 파트너를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더 알아듣게 말했어야지.”


콕, 콕, 콕, 콕

가슴 밑 어딘가를 마구 쑤셔대다 박혀 버린 말.



어떻게 그걸 착.한.척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팀장님이고 뭐고…. 내 의도를 매도하는 것 같아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의 속뜻을 파악하고 싶지도 않았고, 안 그래도 심란한 탓에 머리가 굴러가지도 않았다. ‘착.한.척.하.지.마’라는 다섯 글자만 맴돌았다. 막내 인생 3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박하고 싶은 순간이 이때였다.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어쨌든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깨고 팀장님이 말했다.


“일단 시간 없어. 다시 요청해야 할 것 같다. 무슨 말을 들을까 걱정할 겨를도 없어.”


정말이지, 백번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파트너의 기분을 생각하느라 의견 전달도 제대로 못 했다니!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맞았다. 무엇보다 정말 급했다. 팩트 폭행당한 마음은 나중에 돌보기로 하고 수정작업에 매달렸다. 일단 디자이너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이번엔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처음부터 명확히 전달하지 못한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예의를 갖춰 다시 한번 요청했다. 상황을 인지한 디자이너는 며칠 후, 우리가 원하는 디자인에 맞춰 수정안을 보냈다.


드디어, 원하던 결과물이 나왔다.


한 장 한 장, 우리의 리더는 나를 세워둔 뒤 질문이 생길 때마다 물어보고 납득할만한 답변을 듣고 나서야 검토를 마쳤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큰 산을 넘었으니 나머지 수정과정은 순탄했다. 마침내! 최종 시안이 완성되었다. 인쇄소에 데이터를 넘기고 인쇄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인쇄 이후 한 번의 시련이 남아있었지만, 저 때는 몰랐으니.)


상황이 정리되고 팀장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내 문제를 직면하고 인정하면서부터 착한 척하지 말라는 팀장님의 뼈아픈 충고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한 행동은 가관이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어린애가 본인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사회초년생의 어리숙한 실수라고 넘어가준 것이 다행이지 싶다.( 여담으로 디자이너 선생님과는 지금까지 함께 작업하고 있다. 맞춰가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지금은 소통도 매우 편하고, 안정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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