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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숙 Sep 27. 2023

야구와 맥주

시시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남들에게 시시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훌륭하진 않더라도 괜찮은 사람 정도로는 보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13년 전쯤 초여름이었다. 기아타이거즈와 SK와이번스와의 야구 경기가 있던 날. 나는 기아 타이거즈의 팬인 신랑을 따라 문학경기장 원정팀 응원석에 앉아있었다. 기아 타이거즈는 시즌 개막부터 부진한 경기를 이어오고 있었다. 


                                          KIA:SK경기, 문학경기장 <출처 : https://blog.naver.com/joyclown>


난 누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는 편이라, 야구장에 가면 주로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날은 앞자리에 앉은 두 남자가 맥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건배하고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밝은 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들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맥주 여러 병을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마주 앉아있었다. 마른안주도 가끔 먹으며, 맥주를 하나 둘 해치웠다. 조용해서 별로 먹지 않는 것 같지만, 유심히 보면 꽤 빠르게 들이키고 있었다. 맥주를 먹기 위해 야구장에 온 것도 같았다. ‘나도 맥주를 좀 마셔볼까?’ 다른 사람들이 먹는 맥주는 늘 시원하고 맛있어 보인다. 상대 팀이 또 홈런을 쳤다. 꽤 많은 사람이 김빠진 얼굴로 스르르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경기 말이라 그런가. 맥주를 마시던 그들도 일어나 나갔다. 뚜껑도 따지 않은 새 맥주가 여러 병 남아있었다. 누구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남겨진 맥주를 수줍게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내 가방에 넣는 순간, 두 남자가 돌아왔다.     




아, 담배를 피우고 왔구나.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맥주가 보이지 않자, 이상한 듯 주변을 살폈다. 허리를 굽혀 의자 아래를 열심히 들여봐도 소용없었다. 그들이 찾는 맥주는 내 가방 안에 있었으므로.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귓속말했다. “저 여자가 가져갔나 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본들 변명일 뿐이다. 차라리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만 있다면. 애써 관심 없던 야구 경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이 점점 경직되고 입술이 떨렸다. 맥주 냉기가 몸속으로 스으윽 들어온다. ‘이제라도 돌려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구차하다. ‘이미 늦었어. 주려면 아까 줬어야지.’ 


“혹시 여기 있던 맥주 보셨나요?” 하고 그들이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가방 좀 열어보시겠어요?” 내가 가방을 열어 보이니 그들이 찾던 맥주가 있다. 당황한 나는 아무 말로 둘러댄다. “제가 집에서 가져온 맥주입니다만.” 으악 상상만으로도 부끄럽다.

나와 맥주, 두 남자 외엔 커튼이 쳐진 것처럼 시야가 좁아진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몰려오자, 나의 몸속 장기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절도죄에 대해 아는 정보를 긁어모은다. 절도죄의 요건과 처벌에 대해. 잠시 후 모인 정보는 – null- 없음. 

난 가방을 쥔 채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보, 집에 가자.”      


급하게 야구장을 나왔다. 갑자기 달리면 수상해 보일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이놈의 맥주! 아무 데나 버리고 싶었지만, 누가 볼까 봐 멈춰 서지 못했다. 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목에 깁스한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15분가량을 걸어 집에 도착하니 목덜미가 뻑뻑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꼴도 보기 싫은 맥주는 한동안 작은방에 던져놨다.     


기억은 잊고자 할수록 떠오른다. ‘죄송합니다. 두고 가신 줄 알았어요.’ 그때 하지 못한 말은 아직도 입속에 맴돈다. 부질없지만, 맥주를 꺼내 슬그머니 돌려주는 상상을 한다. 처음 보는 그들에게 남의 물건이나 슬쩍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내 나이 마흔다섯 중년이지만, 여전히 시시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뿐이다.


진짜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볼까 하여 용기를 내본다. 딸이 내 얘길 듣더니 “엄마, 왜 남의 맥주를 훔친 거야?!” 진지한 고백에 이상한 웃음으로 엄마를 놀린다. 자기 것이 아니면 욕심내지 말라고 늘 말하던 엄마가 발끈해서 대답한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간 줄 알았다고!” 약간은 수치스러웠지만, 이상하게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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