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관계, 감정, 존재의 자아 4가지 자아 축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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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단순히 논리나 감정만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맥락, 감정, 구조, 결과, 의미가 동시에 작동한다. 문제를 구조화하려는 성향과, 타인의 감정을 조율하려는 성향, 그리고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민감성, 모든 것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존재적 갈망이 동시에 움직인다.
이런 복합성은 나를 느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단단한 정합성과 진정성을 만들어준다. 나는 대체로 이렇게 움직인다:
“이 선택은 논리적으로 맞는가?”보다 “이 선택은 지금의 나와 맞는 흐름인가?”를 먼저 묻는다.
“이 일을 해내는 게 중요한가?”보다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먼저 감지한다.
“말을 잘했는가?”보다 “상대에게 내 진심이 전달되었는가?”에 감정이 더 오래 머문다.
“내가 기대한 만큼 반응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큰 실망과 자기의심이 발생한다.
나는 감정과 의미, 논리와 흐름이 통합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판단은 항상 ‘정리’된 채로 남기보다 내면에서 유연하게 순환된다.
나의 흔들림은 단지 실패 때문이 아니다. '진심이 닿지 않았을 때’, ‘내가 나답지 못했다고 느낄 때’, 가장 크게 요동친다.
진심을 다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때 (정서적 공허)
내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 오해가 쌓였을 때 (표현 미달 자책)
의미 있다고 여겼던 일이 구조나 무관심 속에 소멸될 때 (존재의 무게 상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곧바로 자기 점검으로 이어진다:
“내가 부족했나?” → “왜 이렇게 느꼈지?” → “이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루프는 성찰과 과잉 분석 사이를 오가며, 나를 정직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피곤하게도 만든다. 또한, 때때로 이 감정은 '거리두기' 혹은 '일에 몰입함으로써 회피'하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그조차도 내 감정 처리의 한 방식이다.
나는 성실한 구축자이자, 예민한 조율자이며, 의미 중심의 감각자, 그리고 감정을 글로 소화하는 창작자다.
내 삶의 방식은 다음의 패턴으로 요약된다:
설계하고 정리한다: 혼란을 구조로 바꾸는 능력. 복잡한 업무든 감정이든 일단 분류하고 맥락화한다.
조심스럽게 연결한다: 타인에게 말을 아끼지만, 말의 뉘앙스와 감정은 누구보다 빨리 읽는다.
느끼고 곱씹는다: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분석한다. 그러나 때로는 ‘분해’하다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쓰고 해소한다: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자신을 구성한다. 말보다 글이 더 정직할 수 있다고 느낀다.
묻고 정렬한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 일이 나다운가?’, ‘나는 지금 내 흐름을 살고 있는가?’다.
나는 삶을 단순히 '살아낸다'기보다, 매 순간을 읽고, 감지하고, 정렬하며 산다. 그러나 어떤 날은 유쾌하게, 가볍게 흘려보내며 웃기도 한다. 그 유연함 덕분에 나는 유지된다.
나는 완벽한 일관성보다는, 유기적인 일치를 추구한다.
‘일’과 ‘삶’이 따로 노는 것이 싫고,
‘성과’와 ‘가치’가 연결되어야 동기가 생기며,
‘감정’과 ‘표현’이 일치해야 관계가 지속된다.
나는 나를 하나의 역할이나 기능으로 가두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변형되고, 교차되며, 조율되는 유기체에 가깝다.
그래서 중요한 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이 흐름과 함께 있고 싶은가?”
“이 선택은 내게 어떤 정서적, 존재적 울림을 주는가?”
그 물음에 감정과 판단이 동시에 ‘예’라고 말할 때, 나는 움직인다.
나는 다음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구조적 설계자: 혼란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체계로 바꾸려는 내면 엔지니어
정서적 민감자: 말의 결, 눈빛, 감정의 색온도를 빠르게 감지하는 감각자
자기 성찰자: 느끼는 것을 해석하고, 의미 없는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사유자
의미 통합자: 일, 관계, 감정, 시간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려는 존재 설계자
표현 조율자: 내 진심이 무례해지지 않도록 항상 조절하며 표현하는 관계관리자
유쾌한 사람: 가끔은 농담처럼 진심을 말하고, 웃음 속에서 마음을 나누는 사람
나는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나를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를 더 명확히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런 흐름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흐름은, 나다워서 좋다.”
나는 의미를 쓰며 찾는다. 글을 통해 내 감정과 사유를 정리하고, 나를 설계한다. 글은 나에게 일기장이자 지도이고, 종종 거울이다.
글이 되지 않으면, 나도 어딘가 막혀 있다는 신호다.
글쓰기는 감정을 말보다 더 깊게, 더 정제되게 표현하는 수단이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감지하지만, 강하게 반응하는 것을 꺼린다. 감정이 너무 격해질 때는 ‘표현’보다 ‘정리’를 선택한다.
내가 조용해질 때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눌러둔 것이다.
때로는 거리두기 자체가 감정 조절법이다.
나는 생각이 깊고 신중하지만, 동시에 유쾌하고 재치 있다. 대화에서 상대가 웃으면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웃음을 만드는 것도 내 방식의 배려다.
유쾌함은 긴장을 녹이는 나만의 소통 전략이다.
나는 사람을 믿고 싶다. 동시에 너무 믿어서 다치지 않으려는 방어선도 갖고 있다.
신뢰가 무너졌을 때, 나는 빠르게 철수하기보다 조용히 거리를 둔다.
회의는 나를 차갑게 하지 않고, 다만 선을 그어준다.
이 다양한 얼굴들 덕분에 나는 더욱 입체적이고 유연한 존재가 된다.
“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여러 조각들의 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