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 #2

by 비구름

어느덧 길거리 행인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옷장도 반팔로 한가득 찼다. 생일인지라 교회가 끝난 후 서현역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참이었다. 선우와 함께 약속한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사실 조금 짜증이 나있었다.


“있지, 네 생일이니까 그냥 네 맘대로 하면 되는데..”

같이 초대된 나은이가 함께 학년 대표를 하다 선우에게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감이 잡혔다. 아마도 학년부회장 선우 쪽에서 학년회 일에만 집중하지 않아서 학년회장이던 나은이 입장에선 화가 났을 것이다. 처음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아이들이 다들 선우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점점 실망했다. 물론 자신들에게 항상 다정한 그를 착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몇 달 지나니 결정적인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저것 손대는 일이 많아서 한 가지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사람에게도 조금 그런 경향이 있어 아이들이 섭섭한 경우가 생겼다. 같이 노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친구들이 점점 줄어드는 데다 완전히 ‘종교에 빠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워낙 ‘인권과 철학’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세뇌당한.. 아니, 교육을 받은 학생들 입장에서야 기독교가 약자를 차별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분노 혹은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살갑지만 이미 너무 기독교에 심취한 아이라고 다들 여기고 있었다. 아, 참고로 나는 당연히 선우 편이었지만. 자신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의 행동마저 선의로 갚는 그의 인내심을 매우 배우고 싶었다. 크리스천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설마 다른 학생들 눈치 보느라 학교에서 나와 가까이 지내지 않은 나은이 말 때문에 늘 옆에 있던 선우를 빼겠는가. 불편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본인이 안 온다는 것도 아니고 그를 제외하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름이다!”

선우는 내 속도 모르고 평소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너만 좋으면 됐다.”

“응?”

“아니.. 가자”

그렇게 5월이 지나며 6월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봄비야.”

“뭔데?”

찬양도 모여 불러, 책자 공부에 큐티도 같이 하자더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싶은 건지 웃기면서 한편으론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저 녀석, 뭘 하고 싶든 나한테만 말하면 항상 같이 시작하는 걸 눈치챈 건가.

“우리, 학교에서 기도모임 해볼래?”

귀를 의심했다. 우리 학교에 기도모임을 만들자고?

“주일에만 예배드리는 것보다 수요일에 예배 한 번 더 드리는 게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을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분명히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겠지만 어렵다가 불가능하다와 완전히 동의어는 아니니까.

“뭐 챙겨야 하지?”

“일단 장소부터 알아봐야겠어. 생각해 둔 곳이 있거든.”

굳이 더 묻지 않아서 그땐 선우의 생각은 잘 몰랐다. 설마.. 그 염두에 두고 있다는 장소가 미술실이었을 줄이야. 실제로 그것을 해내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된 난 그의 패기가 실로 놀라웠다.

“말이 되냐?”

“나도 몰랐지. 일단 여쭤봤는데.”

우리의 차선우가 학교에서 가장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봐도 과장이 아닌 미술 선생님께 기도모임 장소를 빌렸다. 선우더러 수업시간에 광신자라고 하는 바람에 애들 앞에서 대놓고 그러면 안 된다며 희재에게 한소리 들은 이력이 있는 그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다.

“미술실에서 기도모임 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걸 상상하다니 대단하다.”

좁은 미술실 뒷방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시작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우리 둘만 있으면 학생들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었겠지만, 영어 선생님이 기도모임에 합류하시는 덕에 대놓고 공격받는 일도 면했고 말이다. 아, 영어 선생님 오시면서 뒷방도 탈출해서 미술실 전체를 쓰게 됐다. 좀 모임 같은 모임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나도 어떻게 예배를 진행할지 어느 정도 감을 얻었다.

“어.. 악보 몇 개 없어졌어.”

“찬양 악보 파일 다 정리해 놨어. 그거 보고 골라.”

깨달았을 땐 본의 아니게 선우의 오른팔이 되어 있었다. 가끔 그가 이번 예배 진행하기로 했던 내용을 다른 학교 일 때문에 잊으면 잘 기억하고 있다가 옆에서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사실 어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나를 생기 넘치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웃는 표정을 지은 것이 아마도 고등학교 때가 유일한 것 같다. 철학시간만 되면 동급생들이 혼전순결에 대해서나 선악과에 대해서나 개신교에 대한 편견 (애초에 교회에서 가진 적 없는 입장이었다)을 이야기하며 늘 논쟁하려고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겐 기도모임이 있으니까. 학교가 즐거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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