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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Feb 24. 2022

디어 마이 프렌드

dear my friend


 제주도에 가기 전, 해보고 싶은 리스트를 몇 가지 적어갔다. 그중에는 보고 싶던 영화들도 적혀 있었다. 이 중 유일한 드라마가 있었으니, 바로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였다.


 드라마에서는 저마다의 이유로 한 가지 씩은 불행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와 엄마의 엄마는 모두 힘들고, 아빠는 입을 닫고 언성을 높여 화풀이하는 것으로 걱정을 대신한다. 얼핏 가족 드라마 같기도 하지만, 가족만큼 가까운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에피소드마다 아줌마들의 멋있는 우정이 나오는데,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는 장면이 있다.


 4차원의 순둥이 엄마 김혜자는 치매에 걸린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김혜자는 실종된 상태였다. 며칠만에 서울 근교에서 발견된 그녀는 포대기에 인형을 업고 멍하니 걸어가고 있었다. 김혜자의 베스트 프렌드인 나문희가 안도하며 그녀에게 집에 가자고 하지만, 치매에 걸린 김혜자는 이전에 본 적 없던 얼굴로 고함을 지른다. 자신의 첫째 아들이 고열로 아파할 때, 그러니까 이미 수십 년도 전에, 나문희가 도와주지 않았다며 원망의 말을 퍼부은 것이다.


 “이 물어뜯어 죽일 년. 내가 너한테 전화했지. 내 아들이 열감기인데 도와달랬지. 무섭다고 와달랬지. 왜 맨날 넌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 왜 맨날 힘들어서 내가 필요할 땐 없어. 그래서 내가 맘 놓고 치대지도 못하게. 내 아들 살려내 이년아, 내 아들 살려내.”


 자신에게도 말하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었음에도 끝내 말하지 않고 듣고 있는 나문희를 보면서도, 자신의 등에서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아직까지도 절절히 괴로워하는 김혜자를 보면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영주가 생각났다.


 늘 붙어서 깔깔거리기 바빴던 초, 중, 고 시절부터 서로에게 남자 친구가 생겨 조금씩 못 볼 때까지도 우리는 만나면 늘 까불어댔다. 그러다 내가 점점 어두워진 후로 영주에게 걸려온 가벼운 전화 한 통에도 줄곧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았고 영주는 늘 들어주기 바빴다. 요 몇 달 전, 자신의 친동생과 싸운 것이 분하기도 속상하기도 하다며 며칠 잠깐을 나에게 의지해주었던 일을 빼고는 최근 오년 간은 거의 내가 화자가 되는 편이었다.


 가족 문제가 덮쳤을 땐 정말 힘들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며 우리 가족을 가장 많이 보았던 친구도 영주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내 나이 스물넷에 갈라섰어도, 사회에서 보는 나는 그냥 이혼 가정의 자식일 뿐이었다. 그들은 부모님 두 분이 같이 있는 걸 본 적도, 부모님과 함께 있는 내 모습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영주에게 가족 이야기를 가장 많이 털어놓았던 것 같다. 한동안은 너무 안 좋은 상황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자제를 해보려 한 적도 있었으나 영주는 늘 기꺼이 안부를 물어주었다.


 아무 일도 겪지 않아 철없던 나이에도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연 있는 사람이 되기 싫다고. 경험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사연 많은 사람이 되긴 싫었다. 아마 나를 어렵고 복잡하게 보는 게 싫어서였을 것이다. 20대엔 나를 그저 나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내게 내 주위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혹여 그것이 부정적이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되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연은 한 겹 두 겹 늘어갔고, 늘어간 내 나이테를 영주는 전부 보고 들었다. 영주는 나의 사연 때문에 털어놓지 못한 힘듦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일정이 맞아 이번 제주도에서 잠깐 만났던 영주가 19년 만에 처음으로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툭 건드리면 엎지르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와 달리, 영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애써 숨기지도,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영주는 여태껏 왜 내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사는게 힘들었어서 였을까, 영주에게 던졌던 물음표가 부족했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이야기할 타이밍이 이제야 온 것일까.


 그리고 일주일 전 언니의 결혼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때와 똑같이.


저한테도 규리가 제일 친한 친구고, 규리한테도 제일 친한 친구가 저일 거예요. 그냥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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