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전복
서른여섯. 내가 처음으로 인식했던 엄마의 나이다. 그때의 엄마를 따라잡으려면 이제는 5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당시 고작 여덟 살인 나에게 엄마는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였다. 역사, 영어, 정치까지 엄마는 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생소한 요리를 먹을 때에도 엄마는 내게 주문하는 법과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스무 살 남짓 즈음까지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이후 거의 모든 외식을 가족과 함께 했던 학생 때와 달리 더 큰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 되고 월급을 버는 직장인이 되면서, 그러니까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경험이 더 많이 생기면서, 가족 외식의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아빠는 일과 약속으로, 딸 둘은 친구들과 만나기 바빴고, 기껏해야 배달 음식으로 바깥세상을 때우던 엄마는 그렇게 외식과 점점 멀어졌다.
차 뒷좌석에 앉아 백미러로 눈을 맞추며 당신들이 새로 찾아낸 음식점을 설명을 듣던 시절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내가 유명하고 좋은 곳을 찾아 모시고 간다. 주문부터 결제까지 내가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생소한 식재료나 먹는 방법을 알려주곤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가끔 뒷좌석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리움보단 보람이 더 크다.
엄마는 세상 모든 잡다한 것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잘 알았다. 나를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를 떠올리면 언제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중학생이었던가, 워낙 덜렁거리는 성격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당시 꽤 고가였던 지갑을 다시 샀다. 아마 용돈에 부모님 돈을 보태어 샀던 것 같은데, 일주일 만에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다. 또 지갑을 잃어버리고 만 나 자신과 그것이 하필 비싼 것이라는 죄책감이 나를 끙끙 앓아눕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낙담할 일이었는지 지금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그때의 나는 일주일 동안 집에 들어와서 음식도 잘 먹지 않고 방에 들어가 나가지도 않을 정도로 속상했다. 그때 엄마는 슬며시 내 방문을 열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참던 눈물을 터뜨리며 이런저런 사정에 나 자신이 화가 나기도, 속상하기도 하다며 고백했다. 그때 엄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럴 수도 있다며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그리고는 다시 웃으며 함께 덜 비싼 지갑을 다시 사러 갔더랬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의 이런 널따란 이해심도 스무 살 남짓에 머물러있다고 느낀다. 나이가 들면서, 여자였을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언제든지 나는 엄마를 이해해야 했다. 아니, 솔직히 이해가 됐다. 당당했을 젊은 우리 엄마, 그 기세가 꺾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일들, 시집살이와 육아 스트레스, 장녀로서의 부담감 등 엄마가 말하는 대부분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의 고통을 감히 전부 헤아릴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난 그래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어쩌면 내가 엄마의 보상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될 수 있으면 엄마와 식사 한 끼라도 하려고 했고, 약속이 많을 때는 엄마의 커피에 곁들일 디저트를 항상 포장해갔다. 엄마의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적엔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같이 가곤 했다. 처음 큰돈을 벌었을 때부터는 민화 그리기, 한식 수업, 영어 강의 등 생활을 벗어난 엄마만의 취미를 꾸준히 지원했다. 쌓이는 연차에 여유가 생겨 엄마에게 비싼 생일 선물을 안겨줄 때에도, 나는 정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과 편지를 다시 선물하기도 했었다. 끝내 엄마는 그 책에 단 한 글자도 채우지 않았지만. 엄마가 여태 내게 준 마음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돌이켜보면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할 만한 일들을 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를 이해해 주는 엄마를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언젠가부터 내가 힘들어하고, 방문을 굳게 닫아도 엄마는 내게 마음을 물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나 스스로 풀리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성인이 된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방관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만약 엄마에게 감정이 상하는 일이라도 있어 털어놓기라도 하면 엄마는 성가시다는 듯 말을 말자며 손을 휘이 젓기도 했고,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무조건적인 이해를 요구하기도 했다. 꽉 찬 쓰레기봉투처럼 넘치는 섭섭함을 꾹꾹 눌러 밟았다가 꺼내어 놓아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나는 엄마에게 무관심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언제든 나를 수용해주던 엄마와 나의 관계가 언제부터 전복된 것일까.
어린 시절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컸다. 부모님의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고, 그중에서도 엄마와 나의 사이는 더 특별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얼마 전 엄마와 꽤 큰 충돌이 있었고, 두 달이 넘도록 한마디도 않고 지내고 있다.
한 번도 말썽 피운 적 없는 서른한 살의 내가 그 어린 사춘기 시절에도 한 적 없던 가출을 했는데, 외할머니와 아빠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엔 단단한 걸쇠가 걸렸다. 엄마는 늘 내게 무엇이든 잘할 아이, 어디서든 굶지는 않을 아이라며 믿음인지 방관인지 모를 말을 하곤 했는데, 연락 없는 것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생각한다.
정말 신기한 것은 31년 간의 관계가 단 두 달만에 이렇게 차갑게 식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은 숙소로 전락했고, 엄마와 티브이를 보며 깔깔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어색해졌다. 가족 중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 아니 세상에서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 엄마이기에 한동안은 엄마가 미울 것 같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 관계의 전복이 아직은 힘들다. 다정하고 맑고 단정했던 어릴 적이 그립다. 살수록 가족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