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뇌를 지닌 아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괴물

by 무명

싱글 맘인 사오리의 시선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하나뿐인 아들 미나토는 과묵한 성격이다. 사오리는 아들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나갈 때까지 보호할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들이 이상하다. 신발이 한 짝이 없어져서 집에 온다거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에서 혼자 잘라버린다거나 밤늦게까지 안 들어온다던가 하는 일이 잦아진다. 귀가 다쳐서 들어오기도 한다.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던 아이를 찾아서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버려진 터널에서 발견하고, 차에 태워 돌아오는 길. 갑자기 옆에 앉아있던 아이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3부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처음에는 싱글맘인 사오리의 시선, 2부에서는 선생인 호리의 시선, 3부에는 미나토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같은 시간을 동일하게 지나면서, 같은 사건을 3명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분명 미나토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걸로 볼 수밖에 없다. 사오리가 묻자, 미나토는 호리 선생이 때렸다고 말했고 사오리가 찾아간 학교의 대응은 이상하고 미진하니까. 이런 사건이 선생의 시선으로 보이게 되면, 호리 선생은 너무 선한 인물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고 다양한 오해들이 켜켜이 싸여 고통받는 인물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 스포일러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느낀 바대로,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려 한다.


돼지의 뇌

영화는 화재가 난 건물을 집에서 구경하는 사오리와 미나토로 시작한다. 이때, 미나토는 이상한 말을 꺼낸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돼지일까, 인간일까?" 뜬금없고 이상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지나치게 되는 이 말은 다시 등장하는데, 미나토의 반 친구인 요리로부터 다시 나온다. 요리는 자신의 뇌가 돼지의 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가 아프다고 말하며, 이를 고칠 거라고도 한다. 이런 아버지의 언사가 영향을 미친 건지, 요리는 미나토에게 전염되는 게 아니라고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과자를 나눠줄 때 깨끗하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날, 미나토는 요리가 만졌던 자신의 머리를 집에서 잘라버리기도 한다.

영화가 후반기에 다다르면 요리가 가진 성향이 드러나고, 요리의 아버지가 고치려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요리는 동성애자이다. 이를 요리의 아버지는 질병으로 보아 고치려 하는 것이다. 돼지의 뇌가 머리에 든 것이라며, 비하하고 공격한다. 돼지의 뇌란 그런 성향을 의미한다.

영화의 1부에서 미나토는 자신의 뇌가 돼지의 뇌라는 이야기를 호리선생으로부터 들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라 생각한다. 1부와 2부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오해는 미나토가 자신이 돼지의 뇌를 가졌다는 걸 깨달아가면서 발생한다.

영화 속 오해들은 미나토가 요리와 가까워지면서, 거기에 자신이 요리를 좋아하게 된 것을, 즉 자신도 동성이 좋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서 겪는 혼란과 고통으로 모든 사건이 유발된다.


우리 사회도 그렇지만, 일본 사회도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자신이 그런 성향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상당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거다.

동성애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읽고, 봐왔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이미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주변인물들에게 아웃팅 하면서 겪는 고통이나, 그들의 차별받는 삶 등을 그리면서 동성애자의 현실을 조명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조금 차이가 있다. 초등학생 아이인 미나토와 요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아이들의 동성애를 다룬다는 것에 있어서 순수한 애정을 다룬다.(보통의 동성애자들 이야기는 다 성인이고 다소 선정적인 묘사가 잦다.) 더 중요한 건, 본인의 동성애를 깨닫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는 게 독특하다.

개인적인 생각에 초등학생이라는 나이는 꽤 어린 나이다. 난 그 나이에 좋아하는 이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진심 어린 사랑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랑보단 좋아하는 아이 정도의 인식이었다. 우리 사회는 이성애를 당연시하고 있고, 그런 묘사들을 접하면서 살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당연히 이성을 좋아해야 한다 여기게 되고, 실제로 이성을 좋아한다. 초등학생이어도 일종의 남녀사이의 내외를 하면서 무리가 형성되고 사귄다던가, 누가 누굴 좋아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퍼지기 마련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자신만은 달라서 동성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명확하게 깨닫기란 실제로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은 자신도 자신을 알 수 없어서, 복잡한 혼란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미나토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고, 요리로부터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요리는 그런 성향은 돼지의 뇌라며 자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미나토가 하는 거짓말, 오해를 불러일으킨 행동들은 모두 이런 혼란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사회의 편견에 맞설 힘이 아직은 없는 어린 나이이기에 사건들이 오해가 쌓여 꼬이게 되는 것이다.


요리의 아버지는 이를 돼지의 뇌라며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보며, 요리를 때린다. 가정폭력이 이루어진다. 치료할 거라는 말에서 하나의 경험이 떠올랐다. 대학을 다닐 때, 대학원 수업으로 강의를 들을 때였다. 강의 교수님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셨고 교회에서도 한 자리를 하시는 분이었다.(교회는 잘 몰라서 무슨 자리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 수업을 하시던 와중에,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유전자의 차이로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시도가 있었고, 이들을 유전자 변형을 통해 치료하려던 시도들을 소개했다. 교수님께선 이를 고쳐야 할 질병으로 규정하시고 수업을 진행했었는데, 강의의 마지막에 뒤에서 한 선배가 손을 들고는 말한 게 인상적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그렇게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타고난 성향은 인정해야 하는 요소라는 말이었다. 강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영어를 쓰는 강의기도 해서 그랬는지, 교수님과 대학원생 선배사이의 언쟁은 지속되지 않고 끝이 났다. 다만, 그른 것에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를 존경하게 되었다.

대학원생이면 꽤 어른이다. 그 어른도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고 어쩌면 그분도 다소 두려웠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요리는 당연히 아버지한테 반항할 수 없다. 미나토도 마찬가지다. 미나토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세상의 편견에 맞설 힘은 없다.


신발 한 짝

미나토가 어느 날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집에 온다. 걱정이 된 사오리는 한 짝 어디 갔냐고 묻자. 친구에게 선물로 줬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영화의 초반 이를 바라보는 사오리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같다. 관객이 보기에도 선물로 줬다는 말이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 나중에 사오리가 요리의 집에 가보니, 그곳에 미나토의 신발 한 짝이 놓여있고 미나토가 빌려준 것이라 말한다. 3부에 들어서 미나토의 시선으로 이야기의 진행을 다시 보면, 미나토가 정말로 자진해서 요리에게 빌려준 게 맞다. 둘은 신발 한 켤레를 한 짝씩 나눠 신으면서 깽깽이 발로 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외에 신발 한 짝만 신은 장면은 2부에서도 나온다. 호리 선생이 폭력을 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공개사과를 진행하고 나서는, 마을 신문에도 사건이 실리면서 마을 전체의 괴롭힘이 호리 선생에게 가해지기 시작한다. 초췌해진 호리선생이 자살 생각이 들어, 학교 옥상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 신발 한 짝만 신고 있고 영화는 이를 클로즈업하며 강조한다.


신발 한 짝을 보면서 든 생각은 외눈박이 마을의 이야기였다. 외눈박이 마을에서는 두눈박이가 괴물이라는 그 이야기. 결국 어떤 사회에서 소외되는 건, 어떤 특질과 성향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 성향이 소수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은 신발을 한 켤레로 신는 게 보통이지, 한 짝만 신는 건 이상하다. 영화는 미나토와 요리가 신발 한 짝만 신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일반적 범주를 벗어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걸 표현한다. 그리고 서로 한 짝만 신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걸로, 소외된 존재들끼리의 공감을 표현한다.

호리 선생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일반적인 사회의 일원이면서, 선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오해와 실수가 쌓이면서 그 마을에서 배척된 존재가 돼버렸다. 그렇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그게 극에 달하는 순간, 그는 한 짝의 신발만 신고 있다.

그들이 가진 성향과 특성이 그들을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사회가 그들을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시켜서 소수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들은 소외된다.


미나토는 돼지의 뇌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결국엔 호리 선생을 누명 씌웠고 호리 선생도 신발을 한 짝만 신게 만들었다. 미나토는 요리에게 신발 한 짝을 빌려주면서, 서로가 한 짝을 신게 된다. 요리는 이미 신발 한 짝만 신는 존재였다. 그리고 요리에게 선물하면서 미나토도 신발 한 짝만 신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미나토의 거짓말로 인해 호리 선생도 한 짝만 신는 존재가 된다. 마치 요리로부터 시작되어 신발 한 짝이 점차 전염되어 퍼져나가는 거 같이 보인다.

신발 한 짝의 소수자는 사회가 배척해서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회가 누군가를 배척하면 할수록, 점점 소외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새로 태어나다.

미나토는 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엄마인 사오리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새로 태어났을까요. 영화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미나토와 요리의 입에서 새로 태어남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우리 새로 태어난 거냐는 그 물음까지도 하면서, 새로 태어나는 게 아주 중요한 영화의 주제임을 강조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불이란 존재와 함께 이를 재생의 의미로서 이야기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난 비슷하지만 영화 중반에 요리한 했던 우주론과 연결해서 이해했다.

새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미나토와 요리만이 하는 이야기다. 다른 인물들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유이하게 돼지의 뇌를 지닌 아이들이다. 그리고 요리는 아버지로부터 돼지의 뇌를 치료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을 들으며 컸다. 문제는 이들이 지닌 성향은 고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만약 이게 문제라서 고쳐야 한다면,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미나토와 요리는 머릿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신경 쓴다.

빅뱅 우주론에서 이어지는 현대 우주론은 우주가 가속 팽창하는 걸 정설로 여긴다. 그리고 일부 과학자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우주의 팽창을 연결 짓고 엔트로피의 증가가 한계에 다다르면 우주는 열죽음(빅프리즈) 상태가 되며 엔트로피 증가가 멈출 거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에 우주는 수축하기 시작하고 엔트로피는 감소한다. 이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이론인데, 이런 이야기를 다소 간단하게 요리가 미나토에게 한다.

이때 미나토와 요리는 새로 태어나는 대상을 뒤집어서 말하게 된다. 우주론의 결과로 전 우주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 새로 태어나는 건 미나토와 요리가 아니라, 우주자체 즉 세상 자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정체성이 문제시되는 건,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문제다. 사회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사회가 가진 그런 시선이 고쳐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일은 없는 거 같아."

"없다고?"

"없어. 원래 그대로야."

"그래? 다행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로를 기어서 나온 미나토와 요리는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눈다. 동성애란 정체성은 새로 태어나야만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새로 태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다. 그들이 이를 다행이라고 여기어 관객은 안심하게 된다. 본인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불쌍하지 않아.

"나는 불쌍하지 않아."라는 말은 두 인물이 한다. 미나토와 호리 선생. 영화 속에서 가장 불쌍해지는 두 인물이 불쌍하지 않다고 말하는 격이 된다. 불쌍하지 않다는 건 행복한 걸까.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하고 의문스러운 인물은 교장이다. 미나토가 자신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거짓말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교장과 대화를 나눈다.


"좋아하는 애가 있어요. 남한테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했어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금방 들통날 테니까요." -미나토

"누구한테도 말 못 할 거라면, '후' 불어."

"그런 거 다 쓸데없어.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교장


미나토는 불쌍하다.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금방 들통날 거라는 그 말에서 자조적이면서 슬픈 감정이 느껴진다. 진짜 나쁘고 사이코 패스같이 느껴지던 교장이 따스한 말을 건네고, 그 온화한 얼굴에 어울리는 나름의 위로를 건넨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에 결국 미나토의 상황은 변한 게 없다. 교장의 말을 듣더라도, 여전히 미나토는 자신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금방 들통날 거라고 여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나토와 요리가 비가 그친 산길에서 후련하게 즐겁게 웃으며 뛰노는 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두 아이는 결국 폭풍우 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영화적 연출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다음 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주변환경이 깔끔하다. 두 아이는 젖어있긴 하지만, 햇살은 너무 따스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 산길의 나무들이 너무 멀쩡하다. 거기에 영화적 연출로서 너무 환상적으로 그 장면이 다가와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음은 두 아이의 새로 태어난 거냐는 대화다. 새로 태어남은 죽어야만 할 수 있다. 미나토가 아버지는 새로 태어났을 까하고 묻는 것도 '죽은' 아버지기 때문이다. 요리가 수로에서 나오자마자 우리 새로 태어났냐고 묻는 건 그들의 죽음을 암시한다.

현실적 관점에서도 그런 태풍 속에서 두 아이가 산속 폐열차에 들어가 있는 건 위험하다. (산사태 위험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도 내려진 장소다.) 거기에 2부 마지막에 선생과 사오리가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찾지는 못하고 오히려 열차의 유리를 닦는 데 계속해서 실패하고, 결국 그 열차에 아이들은 없었다. 그 후로도 폭풍우가 멈추려면 적어도 하루는 지나야 할 거로 생각된다.

그리고 교장의 말. 행복은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거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행복을 가질 수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말했듯이, 미나토가 교장의 말을 들었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여길 거 같지 않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엔 자신들이 있을 곳은 없다 여길듯 싶다.

물론, 감독은 인터뷰에서 두 아이를 연기한 배우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즐거워하며 연기하라고 디렉팅 했다고 했다. 결국,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두 아이는 죽지 않았다고 감독은 말했고, 이런 감독의 인터뷰로 인해, 안심한 관객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괴물

영화의 제목은 Monster, 괴물이다. 괴물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돼지의 뇌를 지닌 요리와 미나토일 수도 있고, 그들에게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말한 요리의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다소 이상하며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교장일 수도 있고, 편견과 차별, 따돌림으로 사람을 소외시킨 사회가 괴물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쉽게 오해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괴물일지도 모른다.

마무리

개인적으로는 동성애를 깨닫는 순간을 다루었다는 것이 참신했다. 그런 과정을 설득력 있게 잘 그려냈다. 그 때문에 겪는 혼란으로 인한 미나토의 거짓말과 실수들이 너무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미술 시간에 그 혼란 속에서 미나토가 요리를 때리는 장면도 너무 이해되는 흐름이었다.

그리고 3부 구성에서, 사오리와 호리선생이 겪는 그 오해들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관객도 동일한 입장에서 그들과 똑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그 오해들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서 관객인 나도 엄마와 선생의 입장에서 과연 미나토의 문제를 알아챌 수 있었을 거냐 묻는 다면, 모를 것이다. 인간 단편적 시점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를 가능케 한 시나리오의 짜임새가 너무 탄탄하다.

마지막 엔딩 사운드 트랙이 너무 좋다. 지금도 따로 틀어서 듣는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가 나오는 장면을 여러 번 다시 봤는데, 처음엔 그 음악이 아이들이 가지는 해방감을 환상적으로 그려냈다고만 여겼다.

다시 보니, 그 음악은 부모와 선생의 모습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리의 아버지가 넘어지는 장면, 교장이 쓸쓸한 표정으로 비 맞으며 수로를 내려다보는 장면, 호리선생과 사오리가 아이들을 찾으러 산속으로 뛰어가는 장면에도 흘러나왔다. 이 음악은 어른들의 힘듦, 쓸쓸함, 간절함도 대변했다. 그러자, 아이들의 새로 태어나는 환상이 이번엔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결국 사회를 극복하지 못한 슬픔이었다.


P.S. 이동진 평론가의 파이아키아 제목은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에 이르게 하는'인데, 너무 멋진 표현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어른들은 오해를 경유했지만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돼지의 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이며, 마지막까지 어른들은 미나토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물론, 보는 관객들은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에 이르'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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