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위로하다.
일본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았다.
잔잔하게 긴 호흡으로 길게 뽑아내는 3시간에 걸친 영화를 보고 잠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글을 써보려 한다.
너무나도 호평이 많고, 유명 상도 수상한 영화이지만, 예술이란 언제나 그렇듯 그걸 접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와닿기 마련이니, 엄청난 감동과 인상이 영화로부터 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도 그러했다. 너무나도 잔잔해서 중간에 졸리기도 하고, 3시간이란 긴 시간을 계속 집중하고 있기도 어려운 그런 영화였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내용과 장면이 있어서, 그 점에서 논하고 싶다.
이 영화는 연출가인 주인공과 그의 차를 운전해주는 운전사가 주인공이다. 난 그들의 관계와 주인공이 연출하는 연극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나오는 대사에 중요한 인상을 받았다.
먼저 영화의 주된 내용은 주인공의 아내가 외도를 하고 있음을 주인공이 알게 되지만, 그 이유를 묻지 못한 채로 아내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내면에 큰 상처를 입게 되고 연극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 여러 일을 겪으면서 점차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고 연극에 오르게 되는데, 이게 영화의 주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운전사로 오게 된 미사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미사키의 엄마가 죽은 장소, 미사키의 무너져버린 본가에 가고 그곳에서 그 둘은 서로를 안아주며 위로한다. 거기서 주인공은 인식한다. 자신이 자신의 상처를 피해왔음을, 도망쳐왔음을, 그 결과 마주하는 것조차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미사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를 안아준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면서, 그리고 그 마주함으로 인해서 서로의 상처를 적어도 만져줄 수 있게 된다.
난 그들의 그 끌어안음에서 생각났다. 2년 전에 내가 실패를 인정했던 그 시기가.
난 2년 전에 실패했다. 실패하여 정리하고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와,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정리하고 있을 즈음에, 그때쯤 난 그리 가깝진 않았던 후배를 만났었다.
그 후배는 나와 술을 마시면서 내게 말했다. 너무 무서웠던 적이 있다고, 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을 그 기대감이, 자신이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거 같아서, 자신은 그런 인물이 아님을 말할 수 없어서. 그게 무섭다고 이야기했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실패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처절하게 흐느껴 울었다. 처음으로 내가 실패했음을 나 스스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난 내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데 2년이 걸렸다. 내 선택이 잘못됐음을 본심 어딘가는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채, 외면하다가 억지로 도망치다가 결국은 그렇게 인정했었다. 그렇게 갑자기 북받쳐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지자, 그 후배가 옆자리로 와서는 살며시 날 안아주었다. 영화의 미사키도 그렇게 안아주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났다.
다음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이 직접 바냐를 연기하면서 보여주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 장면이다. 바냐 아저씨가 삶의 고통에 크게 상처받아 있을 때, 극 중 인물인 소냐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바냐 아저씨, 어쩌겠어요. 우리 그냥 살아가요.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이 위로의 독특한 지점은, 고통받고 있는 자에게 행복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시련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참고 견디자고 이야기한다. 그나마도 오는 기쁨과 평온은 죽은 뒤에나 올 거라는 위로의 말이라니. 혹자는 위로라고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난 이 체호프의 극 대사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가 알베르 카뮈이다. 난 철학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카뮈가 쓴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내가 느낀, 그의 생각이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위의 위로에서 카뮈를 떠올렸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이야기했다.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정의는 승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언제나 옳고 선한 자만이 보상받아야 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흘러 가는가? 안타깝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카뮈의 이방인은 그런 부분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세상은 부조리함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옳게만 흘러가진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난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거기에 추가로 그는 소설 페스트로 넘어가며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데. 난 그에 대해서 이렇게 받아들였다.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 리유는 절망적인 페스트 상황에서 의사로서의 업무에 충실히 수행하는데, 그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태도는 결코 희망차지 않다. 그는 이 상황이 해결되고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 믿기에 그렇게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사회 속에서 성실히 자신의 본분을 할 뿐이었다. 어쩌면 다소 기계적으로 투박하게. 그게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다.
세상의 정의가 합당하고 옳기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함에도 그저 사회의 일원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태도가 모이고 모여서, 페스트가 자연스레 사라졌듯 조금은 살만 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카뮈한테서 받아들인 삶의 진실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위로의 대사는 이런 태도와 일면 맞닿아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 같지 않은 그 위로의 말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를 보고 나니,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그리고 포근하게 안아주었으면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