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과 나의 두통
찬 기운을 피부로 느끼는 아침이다.
평소에 아침을 시작하며 항상 듣는 라디오를 켰다.
평일 아침 7시에
경쾌한 클래식 기타음으로 시작을 알리는 클래식 프로그램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도
매일 듣다 보면 무감각해질 때가 있다.
오후에 다시 듣기로 미루고 10분 정도 듣다가 기기를 껐다.
음악을 끄고, 사방이 조용할 텐데도
내 양쪽 귀는 시끄럽다.
이명 때문이다.
고주파의 전기음 같은 "삐"하는 소리가
여러 높낮이의 조합으로 두 귀와 뒤통수에서 들려온다.
항상 같은 수준으로 유지된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른 음이다.
언제인가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여러 체크리스트에 "이명"에 대한 항목이 있었다.
나의 이명은 꽤 심한 편이라고 의사가 이야기해 주었다.
"누구나 이 정도의 이명은 갖고 있지 않나요?"라고 묻는 내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누구나에게 있을 것 같은 이 정도 범주의 상태.'
내 모든 질문들은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누구나 이 정도의 어려움은 있다."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나의 여러 가지 상태들은
살면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세상과의 괴리감의 원인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나서도
훌쩍이고 있는 옆 자리.
앞 뒤쪽에서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리들.
"곱게 자란 사람들이 몸으로 표현하는 영화감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숨죽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
무엇이 저 사람들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뮤지컬로 보고 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혼자 앉아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을 때 보다 머리가 더 아팠다.
표가 생겼다며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던 친구가
내 팔을 잡아 올리며 너도 같이 일어나서 손뼉 치라고 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돌덩이처럼 앉아 화를 삭이는 것뿐이었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일으켜 손뼉 치게 했을까.
직접 저런 부당한 일들을 똑같이 겪었어도 저렇게 손뼉 칠 수 있을까…
저렇게 주인공이 희망을 찾는 와중에 비참하게 살해당했는데,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느꼈다는 걸까.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너는 어떻게 그렇게 꼬여있을 수 있니.'라며
어머니의 목소리로, 사람들의 목소리로 스스로를 비난한다.
또 머리가 아파온다. 토할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들이 어떻게 이 영화를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세계의 주인"에서
평범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한 냇가의 한쪽 구석에
어디에서나 볼법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물결의 한 구석 흐름에 모여있다.
그 쓰레기들이 모두 담겨있는 속이 보이는 큰 비닐봉지를
주인공은 엄마가 입원한 병원까지 들고 들어와야 한다.
병원은 깨끗하게 유지돼야 하는 곳이지만...
주인공은 냇가를 깨끗이 하려고 애써 주워 모았을 쓰레기를 어쩌지 못해 들고 다닌다.
영화 속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동생도, 할머니도.
병원 직원들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두세 번 반복해서 봤다고 했다.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했다.
나에게는 영화 초입부부터 대부분의 복선이 모두 보였다.
끝까지 볼 필요도 없었다.
왜 저런 상황에서 주변인들이 저렇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왜 나는 그들의 행동과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지.
평범하다 못해 너무나 보기 좋은 청소년일 뿐인 주인공인데.
왜 마음 편히 있게 해주지 못하는 것인지.
좋은 의도의 서명운동이기에 그냥 해줄 법도 한 서명도
상대방이 하기 싫다고 하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거다.
굳이 굳이 그 하나를 받아내려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 걸, 너는 왜 못해주느냐."
차별이다. 폭력이다.
견디다 못한 주인공은 물리적 폭력과 거친 말과 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그만 좀 해"라는 표현을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상처를 그런 것들로 보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행동과 말이 폭력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
폭력을 겪은 피해자는 특정 상황에서 그 버튼이 눌려지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다.
사회도 피해자를 단순히 피해자로만 바라봐주지 않는다.
부모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치게 한다.
곁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쉬쉬"할 뿐이다.
친구들조차 가벼운 가십거리로 뒤에서 수군거린다.
스스로 소화해 내고 덮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라도 이런 사회에서 불시에 딱지를 까뒤집힐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로 행사한
물리적 폭력이 "학교폭력"으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한다.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상대방은 서명을 받아내는 형태로 자신의 무언의 폭력을 완성한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뜻인지 알지 못한다.
또 화가 났다. 머리가 아팠다.
체육시간에 실수로 맞은 공 하나에도 조용하지만 과하다 싶게 화를 내지만
자신이 강요하는 것은 폭력인지 뭔지 모른다.
왜 저 친구가 저렇게 싫다고 하는지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그냥 넘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네 동생이 당했으면 어떨 것 같냐?'는 말에는 미친 듯이 화를 낸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하는 말인데도 상대방에게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좋은 의도"로 하는 것이라고 내세울 뿐이다.
누구에게 "좋은 의도"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어떤 내용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짐작도 하지 않은 채 즐거운 하루를 보내서 영화를 보러 왔는데.
화가 났다. 머리가 아팠다.
1/3도 지나지 않았는데 상영관을 나가고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나마 마음이 편했던 순간들은
주인공이 봉사활동 단체의 인물들과 어떤 벽도 없는 상태로
진정으로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을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주인공이 규칙은 어기고 마음대로 남자친구를 데려와
"좋은 의도"로 사 온 빵을 나눠주며 인사를 시킬 때 깨져버렸다.
나는 미도가 하는 말과 행동을 모두 이해한다.
주인공의 "좋은 의도"에 또 화가 났다...
자기 말과 행동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본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감독이 전달하려는 것의 1/10이라도 이해했다면 다행이다.
어떤 의미로 극찬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또 다른 "좋은 의도"로 이해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