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자기애가 치솟는 날이 있다. 아침에 말끔하게 눈이 떠진 날. 화장이 바르는 족족 촉촉하게 달라붙는 날. 출근 준비하는 날 누워서 바라보는 남편에게 "나 같은 사람이랑 살아서 좋겠다~" 천연덕스러운 말이 절로 나오는 날. 회사에서 힘껏 쓴 메일을 보내고 나서 다시 메일을 들여다 보고는 "나 참 일 깔끔하게 잘하네" 자화자찬하게 되는 날.
반면 어떤 날은 내가 잘하는 게 뭘까, 왜 이리 실수를 자주 할까,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설픈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다. 올해 초에 특히 그랬다. 2년만의 복직 후 새로운 일을 배워가던 시기, 아이의 고집에 맥없이 저버리는 나날, 이뤄낸 것 없이 시간이 흘러 버렸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이렇게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날 수가 있나.
나는 이제껏 스스로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항상 나는 '지금보다 나은 나'의 모습을 그려왔다. 몇 년 뒤에는 그럴듯한 내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나를 깎아내렸다. 나는 아는 것도 없고 어리바리하지만 어찌어찌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은 이목구비가 잘생긴 것보다 그 사람의 태도가 인상을 결정짓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못생긴 건 아닌데 그 사람의 행동, 태도, 마음가짐이 곱지 않으면, 예뻐 보일 수가 없다는 이야기. "나는 이목구비는 별로지만 인상은 좋지?"라는 나의 농에 친구는 "넌 이목구비도 예뻐"라고 답했다.
이 친구는 나와 다른 점이 많다. 나와는 달리 몸을 잘 쓰고, 붙임성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대한 믿음과 애정이 큰 사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거침없이 하고,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걱정하지 않으며,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역시 내가 귀여운 탓인가" 생각하는, 건강하면서도 밝은 사람이다. 나와는 다른 그런 점이 멋있다 느꼈고 친구의 삶에 동경과 부러움을 가졌다.
자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가까워졌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비슷한 사고흐름에 신기해하며 역시 우린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볼때마다 서로를 예쁘다 했다. 네가 나와 달라서 너를 좋아하는가 싶었는데 사실, 우린 엄청나게 닮았는지도 몰라.
사람의 인상에 대해 말하다가 친구가 말했다.
"너는 자존감이 높은 것 같아"
"나는 항상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몇 년 뒤엔 똑똑하고 야무져지겠지,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스스로 자존감 낮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건 네가 몇 년 뒤에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런 거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는 거야."
항상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했던 나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은 유난히 자기애가 치솟는 날이었다.
요즈음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을만한 일이 많았지만 나는 꽤나 잘 버티고 있다. 누가 봐도 '참 힘들겠다' 싶은 상황에서도 나는 웃고 있었고, 퇴근 후에는 그 일에 대해 그다지 떠올리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선배들이 그런 나를 보며 칭찬을 해주면 곧이곧대로, "나 같은 후배랑 일해서 좋으시겠다" 자만했다.
나는 인정욕구가 강하다.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저 사람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가치하다 느껴지고, 항상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내가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사고를 하고 있다 생각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언젠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 결국 나는 잘 해낼 것이라는 깊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은 추진력이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곧장 옮기고, 어떤 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꾸준히, 끝까지 해낼 것이라는 '자신'이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굳게 신뢰하고 있다.
생각보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기애가 치솟는 날도, 아닌 날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너무나 사랑한 탓이었다. 자존감이 낮다고 자평하는 것조차 자존감이 높은 탓이었고, 나는 언젠가 멋진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도 꽤나 멋지다고 생각하는 나날이 있었다.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갔고,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원하는 회사에 들어갔으며,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나는 가지고 싶은 건 대부분 갖고 있었다. 실수를 많이 하는 내가 바보 같다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을 정도로 후회되는 결정도 없다. 행복한 내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열심히 수집했고, 나의 공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가득하다.
내가 나를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엄청난 만족과 안도감이 들었다. 내게 어떤 시련이 닥쳐도 내가 버텨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의 인정욕구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고 있던 거구나. 나는 스스로에게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구나.
나의 가까운 사람이 꽤 오랜 기간 우울을 앓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었고, 우울을 이겨낼 수 있는 지지자가 되고 싶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지금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녀에게 그다지 힘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항상 하고 싶은 것이 넘치는 내가 부럽다 했다. 자기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작은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과 우울조차 자신을 사랑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닐까.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내가 너무나 안쓰러워서, 무엇이든 잘 해내려는 내가 애처로워서, 나의 모든 마음과 체력에 전원을 꺼버린 것은 아닐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더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더 좋은 삶을 살아도 되는 사람인데.
무기력과 우울은 꼬리를 잡아먹는 뱀과 같아서, 우울한 나 자신을 보며 더 큰 우울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 같다. 비슷한 상황에서 저 사람은 잘 이겨내는데, 이 정도 힘듦에 이 정도 우울을 느끼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이 모든 건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야. 유난히 내가 대견하고 멋지게 느껴지는 그런 날. 오늘이 그녀에게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