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뛰어든 친구들이 하나둘 전집을 사기 시작했다. 뜻을 알 수 없는 영어 이름의 회사들. 오랜 시간 국민템으로 칭송받는 전집 브랜드들이 하나씩 들려왔다. '영사'라고 불리는 분들이 아기에게 이 책이 왜, 지금 필요한지 설명을 해주면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냥 단순한 종이책이 아니라 여러 도형의 교구들, 동요와 동화 음원까지 포함되어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아기와 놀아줄 수 있는 종합 콘텐츠다.
그런데 왠지 나는 전집이 끌리지 않는다. 남들이 다 한다고 하면 괜히 정이 안 가는, 청개구리적 마인드를 가진 애미이기도 하고 언니에게 물려받은 것들이 많아 왠지 새 물건을 사게 되면 망설여지는 구두쇠 애미이기도 하다. 책에 대한 욕심은 큰 사람이라 조만간 전집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고 싶지 않다. 한 권 한 권 아기가 궁금해할 이야기가 담긴 책을 직접 고르고 싶다.
지난 주말 친정집에 다녀왔다. 나는 엄마에게 아기책을 사기 위해 같이 서점에 가자고 했다. 우리 가족은 속초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책을 빌려 읽으며 '책 읽는 가족'으로도 뽑힌 적이 있을 정도인데, 그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었다. 엄마는 어릴 적 장난감 대신 책을 사주고, 주말이면 도서관에 들러 다음 주에 읽을 책을 10권 넘게 빌려오는 사람이었다. 크지 않았던 우리 집엔 항상 책이 가득했고 엄마가 머문 자리엔 늘 책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내게 책을 골라주었고 읽어주었으며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엄마가 우리 아기에게 첫 책 선물을 주면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아기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속초에는 유명한 서점들이 제법 있다. 한 서점은 딸, 다른 한 곳은 아들이 내려와 부모님과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내가 속초에 살 땐 평범한 서점들이었지만 '요즘 감성'을 잘 아는 자녀들이 내려와 새로운 서점으로 탈바꿈했다. 서점이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가 직접 읽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써놓기도 한다. 자녀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 서점이라니, 우리 아기에게 첫 책 선물을 하기 더없이 좋은 곳이 아닌가.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유아동을 위한 책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대부분 포장이 되어 있어 안의 내용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말도 못 하는 아기에게 표지를 보여주며 어떤 책이 맘에 드냐고 물었다. 옆에서 엄마는 이 책 저 책 다 사주고 싶다며 잔뜩 손에 쥐고 계셨다. 글을 쓰는 작가이자, 독서가 취미이고, 독서교육 전문가인 엄마도 손녀에게 선물해 줄 책 고르는 데에는 논리보단 마음이 먼저 앞서고 마는 것이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책. 단순한 책. 이야기가 있는 책. 조작 요소가 많지 않은 책. 정서 이해를 도와주는 책. 엄마 아빠의 목소리로 직접 읽어주는 책.
속초에 오기 전, 친구가 아기 책 고르는 법에 대해 속성 강의를 해주고, 아기에게 어떤 책을 골라주고 어떻게 읽어주는 게 좋은지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을 선물해줬다. 아기를 위해 공부하고 고심한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서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마음을 다시 되뇌었지만 가득 쌓인 색색이 책을 보니 그저 예쁘고 귀여운 책을 사고 싶어 졌다.
결국 나는 내가 읽어보고 싶은 귀여운 표지의 책들 중, 아기가 표지를 보고 관심을 보인 책 4권을 골랐다. 숫자, 한글을 배울 수 있는 낱말카드 책도 사고 싶었지만 강압적인 교육은 좋지 않다는 남편의 제재에 의해 제외되었다.
뜯어서 내용을 보니 역시 7개월 아기가 보기에 너무나 어려운 책들이긴 하지만, 어차피 그림 보는 맛에 열어보는 책들이니 괜찮겠다 싶다. 아기를 위한 마음만 담겨있다면 무슨 책인들 의미있는 선물이 되겠지.(라는 합리화)
아기에게 책을 사주는 건 함께 하는 시간을 알차게 채워주기 위함이다. 아기가 직접 보지 못한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그림들을 눈에 담고 우스꽝스러운 엄마 아빠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새로운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아갔으면 좋겠다. 남들 다 읽는 책도 빠지지 않고 봤으면 좋겠으면서도, 우리 아기에게 딱 맞는 특별한 책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책 한 권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면서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로 녹여냈으면 좋겠다. 아기와 함께 책 읽는 시간이 행복한 순간으로 각인이 되어 평생 책을 읽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엄마 아빠와 책 고르는 시간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기가 머문 자리엔 늘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 한 권에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 속에도, 책을 사러 가는 길에도, 책을 둘러싼 모든 순간에 여러 사람의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책을 고르면서도 이 책은 되고 저 책은 안 되는 무수한 이유들이 떠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지루해하면서 몇 번이고 같은 책을 열어볼 것이다. 책 한 권에 우리는 무수한 이야기를 싣고 아기에게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이다.
책만큼 훌륭한 장난감이 있을까. 책만큼 재밌는 놀이가 있을까. 책만큼 선명한 지도가 있을까. 새로 산 책으로 아기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새로 산 책으로 함께 웃음 지을 순간들이, 책 속에서 펼쳐질 아기와 나의 여행들이 기대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