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나의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매일 아기와 집 앞 산책 나가는 일이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기운이 내려앉았을 때 처음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 산책을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땀이 맺힐 정도로 따스해진 날씨에 더 바지런히 산책을 다니고 있다. 산책을 나가면 꽃밭 앞에서 아기 사진을 찍다가, 꽃밭에 피어난 꽃 사진을 찍는다. 나는 특히 화면 가득 꽃이 담긴 사진을 좋아한다. 햇볕을 가득 머금어 쨍해진 꽃잎의 색을 담는 게 좋다.
길을 걷다가도 꽃을 발견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을 보며 '아줌마 다 됐구나' 생각했다. 왜 우리네 엄마들은 이토록 꽃을 좋아할까.
혹자는 한창 꽃다웠던 자신의 전성기를 떠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혹자는 꽃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운 에너지를 끌어오고 싶은 것이 아니겠느냐 했다. 또, 꽃 사진을 찍어 자녀들에게 보내는 것은 그저 예쁘고 보기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엄마의 본능이라고 했다.
나는 아파트 단지에 가득 핀 꽃들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한다.
어딘가 길거리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이 아닌, 아파트 단지 내 꽃들은 그저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 피어난 꽃들이다. 봄이 완연한 지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듯 꽃잎을 한껏 펼쳐 보였고 그 꽃잎의 색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빛깔이었다. 태생은 다소 서글픈 사유일지라도 태어난 이유를 깨닫고 이내 최선을 다 한 모습이, 내가 카메라에 담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렷다.
보통 인생의 전성기는 20대라며, 꽃다운 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삼십 대의 젊은 시절은 아직 꽃봉오리 시절이며, 중장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꽃이 만개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무슨 모양일지, 무슨 색일지, 무슨 향일지 몰라 하루하루 불안해하며 걱정을 쌓고 있는 청춘의 시절.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지나치게 푸르기 때문에 '청춘'이라 불리는 것일 테다. 내가 임하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고,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있을 그 나이대가 바로 만발의 시절이 아닐까.
만발한 꽃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자체의 모습 때문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 계절과 이듬해의 모습도 담겨있다. 만발한 꽃은 며칠 지나면 갈색빛을 돌며 서서히 시들어 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질 때 다음 계절이 오고 그렇게 이듬해가 찾아온다. 그럼 그 꽃이 남겼던 꽃씨들이 자신의 잎을 틔워낸다. 만개한 꽃은, 다음 계절의 침묵과 이듬해 피어날 꽃을 담고 있다. 나를 희생하여 다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몫을 충분히 해내고 나서야 다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네 모습이, 다만 희생이 아니듯.
색색이 화려한 꽃 옆에 핀 푸른 풀더미를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꽃의 형상이 아니더라도 빤질빤질한 잎이 햇볕에 닿아 광합성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켜게 된다. 눈을 맑게 해주는 푸르름도 있지만, 자신의 몸을 한껏 펼쳐, 가볍게 내려앉은 햇볕을 있는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는 그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한 것이다. 한껏 무르익은 소담한 자태.
비단 꽃뿐만 아니라 내 눈앞에 보이는 여러 풍경들이 오늘의 내 모습을 돌아 보게 한다. 나는 내일을 머금은 봉오리인가, 만개한 꽃인가, 소담한 풀더미인가.
내 속에 피어난 다양한 형상의 꽃들을 만나기 위해. 이것이 꽃 알레르기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도, 매일 산책을 나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