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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y 22. 2021

글 쓰는 것에 대한 로망

문인 가족이지만 글 쓰는 건 부끄럽거든요

우리 집은 문인 가족이다. 극작가 아빠, 교사이자 시인인 엄마,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언니. 어릴 적부터 집엔 항상 책이 가득했고, 엄마 아빠의 책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으며,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12권씩 책을 빌려오곤 했다. 언니의 꿈은 아빠와 함께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나 역시 가족들의 영향으로 항상 독서를 했고, 일기상이나 백일장 수상, 학교신문에 사설을 싣는 일들이 빈번했다. 대학 진학 이후에는 학교 신문사 기자로 3년 간 활동했고, 기자가 되겠다며 언론고시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가족 중 가장 글을 못 쓰는 사람이고, 소설책 읽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글보단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예쁜 그림이 없는 책은 사지 않는다. (안경 역시 만화책을 많이 보다가 초등학생 때부터 쓰게 되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매주 글을 쓰고 품평받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만두고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

평생 글 쓰는 사람들 곁에서, 글을 마주하며 살았지만 나는 왠지 글 쓰는 것이 부끄러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팩트를 나열하는 보고서, 보도자료를 쓰는 일은 좋아했지만 가족들이 하는 것처럼 내 생각을 수필이나, 시, 소설 등으로 써내려 가는 것은 부끄럽고 자신이 없었다. 혼자 멍 때리며 생각하는 것은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자니 나의 소심하고 바보 같은 생각들을 남에게 들켜버리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써서 교환해 읽는 게 우리의 놀이였고, 대학 입시 때도 논술 시험으로 내 성적보다 높은 점수의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내내 학교 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약간의 사실에 과장을 섞은 자소설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입사 이후에는 마케팅, 홍보 업무를 맡아서 하루에도 몇 개씩 보도자료를 쓰, 사실은 보잘것없는 제품을 그럴듯해 보이게 만드는 광고 문구를 쓰면서 돈벌이를 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글 쓰는 재주로 관계를 맺어왔고, 글 쓰는 재주로 먹고 살아가고 있었다.


작년에는 언니와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나의 어린 시절을 글로 남기고 싶어 져, '가족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있어 보이는 단어지만, 그저 어릴 때 있었던 일을 일필휘지로 갈겨쓰고 그것을 가족들과 이메일로 공유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이런 사람으로 느껴졌는데, 엄마는 그때 어떤 생각이었어?'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을 글로 보는 것이다.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 것이니, 꾸며내는 말이나 비문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이 있으면 몰래 화장실에 가서 주절주절 써보는 정도의, 아주 가벼운 글이었다.

추억 나열만 하다가 점차 내가 느꼈던 감정, 생각들도 덧붙이게 되었고, 그렇게 글들이 쌓이니 내 생각이 글로 남겨지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사건을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억하고, 표현해내는 그 간극이 재밌었다. 나는 글 쓰는 것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들만큼 잘 써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문인 가족이라고 소개를 하곤 하지만, 사실 나는 문인이라고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나 역시 글 쓰는 것으로 먹고사는 생존형 글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가족들과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나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에는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문인 가족이라는 타이틀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케터로서가 아니라, 그저 평소에 멍 때리며 생각하는 것들을 글로 남겨보기로. 그까짓 글짓기,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자고.


글 쓰는 게 싫었던 문인 가족의 막내딸은, 이제 이런 로망이 생겼다. 내 글이 우리 가족들에게 소소한 추억여행 혹은 공감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공감해줬으면, 마음의 위안이 되었으면, 때로는 내 글을 읽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글 쓰는 저는 즐거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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