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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에서 나온 탄피 세 조각

by 강충구


“아니! 뼛가루 속에 무슨 쇳조각이야” 3년 전, 성남화장장 고로(高爐) 앞에서 있던 셋째 여동생이 비명을 질렀다. 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장에서 우리 가족은 고열로 시신을 태우는 화로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우르르 모여들었다. “아버지한테 철심을 박은 수술은 하신 적이 없는데 뭐지?” 그 의문을 곧 풀렸다. 화장장에서 긴 세월을 보내셨다는 그 노(爐) 담당 직원이 설명을 해주었다. 어른께서 참전용사가 아니시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더니 탄피 파편이 틀림없다고 했다. 아버님은 수 십 년을 탄피 파편을 몸에 지니시고 사셨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와 6남매 모두 다시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긴 세월 몸에 총탄 파편을 지니고 사셨다니....


영주 산골 촌놈이다 보니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자취생활을 했다. 주말에 집에 들르러 오면 가끔 아버님과 함께 잤다. 주무시기 직전에 아버님은 늘 통증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신다. 한밤중에 어머님 깨워서 통증 부위를 뜸으로 뜨는 건 부지기수다. 어머님은 한약 다리기는 이골이 났다고 하셨다. 6.25 때 남하하는 중공군과 전투에서 총탄이 이마를 스치고 오른쪽 팔에 탄피파편이 박혀 쓰러지고 정신을 잃으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군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하시고 결국 명예제대를 하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 형제들은 국가보훈대상자가 되어 대학등록금과 취업에 국가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탄피 파편 제거는 혈관을 건드려 위험하다고 해서 끝내 못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사셨다. 1952년 12월 전투에 쓰러지셨는데 특히 매년 12월이면 통증은 더욱 심하셨다. 아버님 팔과 등 뒤에는 수술 칼자국과 쑥 뜸 자국, 침놓은 자국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머님은 참으로 꿋꿋한 여인이시다. 50년간 통증으로 사시고 병원을 내 집처럼 다니시던 아버님 뒷바라지를 하시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아닌 다른 여자 같았으면 벌써 도망갔을 것”이라고.... 설상가상으로 97세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3년을 벽에 똥칠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끝까지 시중을 드셨으니까. 아버님을 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삼우제까지 마쳤을 때 어머님 표정은 다소 홀가분해 보였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람의 명(命)은 타고난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릴 때, 늘 통증에 사시는 아버님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우리 아부지요, 내가 중학교 졸업 때까지만 이라도 살아 계시소’라고. 그러나 아버님은 고모님보다도 삼촌보다도 더 사시고 83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서도 우리 남매들에게 ‘영감이 명(命)은 길고 타고 나오셨나 보다’라고 하셨다. 본심으로는 영감이 너무 오래 사실 까 봐 걱정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단 하루도 통증에 자유스럽지 못하셨던 아버님은 그렇게 가셨다. 6.25에 한(恨)이 많으신지 전날인 6월 24일에 눈을 감으셨다. 내가 아내와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뵙고 온 그다음 날에. 끝내 탄피 파편 조각은 빼내지 못하고 그냥 안고 가셨다. 파편 없는 저승에서나마 고통 없이 하루하루 편히 주무시기를 빌어 본다. 국가에서 관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버님 찾아뵙는 것이 소홀이 할까 봐 걱정이 된다. 폭염이 극심하지만 조만간에 대전 현충원에 다녀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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