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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꿈별 Oct 19. 2021

07. 때론 딜레마에 빠지고

찍어내는 서평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언제부터인가 내가 쓰는 서평이 모두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신간 서평단 활동의 빛과 그림자 중 그림자에 해당할 것이다. 책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고 찬사와 비판에 공정해야 하지만 지금 막 세상에 나온 책에 응원을 보태는 쪽으로 치우치다 점차 한 방향으로 고착되어갔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원석은 『서평 쓰는 법』에서 의례적으로 작성되는 주례사 비평은 가치가 없다며 그저 영혼 없는 예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반드시 제 돈 주고 산 책에 대해서만 서평을 쓴다는 분으로부터 또 한 번 배운다. 

‘우연’의 옷을 입고 시작된 서평 쓰기가 달라져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그럼에도 내게 온 한 권의 책은 종종 ‘과제’와 ‘약속의 이행’을 넘어 또 다른 언덕을 선망하고 오르게끔 인도한다.  이제는 어떤 강제 없이도 독서의 완성은 당연히 서평이고, 서평을 쓰지 못한 책은 완독 리스트에 올리지 못하는 강박인이 되어버렸다.    




그때 그 서평>

① [장르문학 산책]조성면/소명출판-지적 매력 만점읽는 즐거움!(20190901)


평소에 좋아하던, 또는 궁금했던 작품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지 기대했던 ‘장르문학 산책’은 마지막 장까지 읽는 내내 감탄의 연속이었다. 저자가 ‘짧고 간단한 칼럼 형식의 글쓰기(7쪽)’를 선택한 이유에 수긍하면서 주제당 2쪽 내외의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 깊이는 충만해 독자를 매료시킨다. 사실 글 쓰는 일을 선망하는 사람으로서 차원이 다른 유려함과 폭넓은 전개에 위트까지, 이런 문장 앞에서 나 자신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      


이해되는 한도 내에서 느낀 감상이고 물론 여태껏 읽지 못한 많은 작품을 대면할 때에는 그저 추측과 고군분투에 머물기도 했고 ‘격렬하게 읽고 싶다, 알고 싶다’는 열의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그중 하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인데 저자는 ‘석학이 쓴 최고의 추리소설’이라고 명명하며 ‘유례를 찾기 힘든 명작’이라 덧붙인다. 삼국지를 포함해 읽어야 할 도서목록은 빠르게 늘어간다.    

  

전체 15개의 장을 순서대로 읽어나가면 좋겠지만 관심 있는 파트를 먼저 펼쳐보기도 한다. 삼 세 번의 원칙을 비롯한 장르문학의 공식들은 블록버스터 영화가 자주 사용하는 공식과도 겹친다(25쪽)는 사실도 흥미롭다. ‘창의력과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주입식 교육과 술 대신 SF를 권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고전을 읽어야 살면서 고전하지 않는다.(77쪽)’ 시간의 무게에 빛바래지 않은 고전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다. 힘닿는 데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다. 자연스럽게 두껍게 읽기, 무시 독서, 무처독서, 고전읽기....그 모두에 동의하게 되고 관건은 늘 실천이다.      

 

8장 ‘추리소설의 미학과 사회학’도 재미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문제적 인물 프랑수와 외젠 바독, 뤼팽의 모리스 르블랑 등 반가운 이름을 다시 만나 오랜 기억을 불러낸다. 홈스의 행적을 일관된 문체로 쓴 ‘명탐정 셜록 홈즈 행장’은 눈에 띈다.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우리 작품을 ‘간추려 본 한국 추리소설 100년’에서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일목요연하게 특징을 정리해준다. 여러모로 읽을수록 더 읽고 싶어지는 중독성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서평 8년 차 시점>

일종의 메타북이다. 무척 즐겁게 읽었고 많이 소개하고 싶었던 책이다. 하지만 서평을 마친 순간에 느꼈던 석연치 않은 마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목적을 가진 독서라지만 너무 찍어내는 서평 아닌가, 더 집중했으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마침표 옆에 나란히 선다. 

그럼에도 서평을 쓰면서 ‘석학이 쓴 최고의 추리소설’, ‘유례를 찾기 힘든 명작’이라 칭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잊히지 않고 메아리를 남겼다. 


다음 해, 글쓰기 동아리에 추천하고 단체 구매와 읽고 토론 후 영화 보기까지 ‘과제와 약속 이행’을 넘어

 ‘또 하나의 작은 언덕’, 꽃도 풀도 신선한 그곳에 이르게 했다.  

 




② [서평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윤기 역/열린책들 

진리란 무엇일까(20200724)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윤기 역자의 수기와 ‘장미의 이름의 열쇠’ 인용글까지 중요한 무언가라도 발견해야 할 듯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는 서문을 다시 읽어야 제대로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회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는 중세의 산중 수도원 한가운데로 독자를 초대한다. 아드소는 박식한 윌리엄 수도사의 필사 서기 겸 시종으로 곁에서 모시고 배움을 시작하게 된다. 어렸던 그가 기억을 되새겨 수기를 기록한 시점은 수도원 사건뿐 아니라 그 자신 생의 모든 시간을 마무리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생의 종말이었다. 기록이 발견되고 번역되고 읽히기까지 길고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로부터 밀명을 받고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수도원에 도착한 후 7일 동안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표면적인 중심축은 수도원 연쇄 살인사건이다. 처참하게 반복되는 살인사건이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심판을 연상케 하기에 추론과 해석을 반복하며 진실에 접근하고자 애쓴다. 그 과정에서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은 가짜 그리스도, 이단 재판, 우월의식 등이 가장 권위적인 집단에서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 숨죽이게 한다. 이런 일들이 과연 가능했던 사실일까 싶어지는 장면들도 꽤 등장한다. 마지막에 비밀은 드러나는데 지금껏 구축해온 기대와는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 노인의 대화는 비극의 전말을 독자에게 보여주며 한 사람의 눈먼 악행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나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868쪽)” 윌리엄 수도사는 기호학자인 작가를 대변하며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시종일관 질문한다. 때론 여유롭게, 때론 유머스럽게 고정관념과 일반론을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으나 막지 못했던 희생 앞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쫓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869쪽)”     


지식의 향연과 같이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사고의 과정, 개념 전개, 서술 등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모두의 자랑거리인 수도원, 그중에서도 ‘장서관’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본체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서책을 지키는 장서관 사서계 수도사가 진리의 원수인 파괴와 망각의 도구와의 전쟁에 삶을 바치며, 그 목적을 위해 접근을 차단하는 미궁의 외관을 취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의 앞뒤 면지에 실린 수도원 평면도는 너무 간략해서 읽는 내내 자세하고 정확한 구조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키웠다. 이 또한 집착일까, 불꽃으로 사라지고 마는 결말은 더 많은 목소리를 전하는 듯싶다.   

   

부록의 “장미의 이름을 여는 열쇠” 중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작품에 영향을 끼친 문헌으로 꼽아 놀라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 도서관장을 지냈던 보르헤스의 모습이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의 모습으로 등장했다니(900쪽) 시력을 잃은 말년의 보르헤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라고 노래했던 그를 오랜만에 떠올린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서 비로소 제목으로 막을 내린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883쪽)” 아주 오래전 먼 곳에서 일어난 나와 상관없는 그들의 일일까? 모든 것을 불구하고 이것만은 지켜내겠다 싶은 나만의 장서관, 나만의 서책이 분명 있다.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정신의 눈을 가리는 비뚤어진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내 틀의 파기를 허용할 때, 조금이나마 자유함 속에서 진리 편에 설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서평 8년 차 시점>

『장르문학 산책』에서 조성면 작가가 ‘화려한 지적 글쓰기’라 칭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이 또한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한자어, 사자성어도 많고 주석을 읽다 보면 또 주석에 발목 잡히고 쉽게 읽히지는 않았는데, 주제는 의외로 명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면지의 평면도를 보면서 수도원과 장서관의 정확한 구조를 알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커졌다. 


윌리엄 수도사도 떠났고 아드소도 ‘죽음의 문턱이 이른 늙은 수도사’(하권 p.881)인 채 작품은 끝났다. 영화에서 윌리엄 수도사 역할을 했던 숀 코네리도 작년(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개역판의 소회를 남긴 역자 이윤기도, 호르헤 역의 실제 모델 보르헤스도 물론이다. 지적 오만과 진리 추구로 시작해 인류 공통의 끝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p.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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