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고심하며 읽고 체크하고 쓴다면
‘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여 함께 읽었던 시간은 오롯이 새겨졌다.
‘뽀개기’라는 이름을 더해 두 번째 여행을 계획하고 모집하고 떠나는 즐거움.
쉽지 않은 고비고비가 나와도 멈추지 않는다면, 넉넉한 결승선이라 늦은 걸음, 빠른 걸음을 춤추듯 반기기에 고심하며 읽는 시간이 나름의 전진으로 각인된다.
“포크너 뽀개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손을 들고 책을 사서 모으고 첫 작품 『압살롬, 압살롬!』 책장을 넘길 때 드는 곤란함 또는 당혹감!
여러 이유를 대며 두 작품을 끝내고 잠시 중단, 중단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지만
사서 쌓은 책탑은 견고하니 어느 아름다운 날, 세 번째 작품을 펼치리라!
푯대 들고 앞서 이끌어주신 깐밤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날짜와 싸인을 날리고도 완독 도서 목록에 올리지는 못한다.
왜? 아직 서평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서평>
[서평]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민음사/이태동 옮김
- 살았던 적 없는 자들의 시간과 죽음 (20210424)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민음사/이태동 옮김)』은 1936년 작품으로 “소리와 분노” 7년 후에 출간되었다. 현지인 미국에서는 포크너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 포크너 작품들 가운데 가장 적게 이해된 가장 위대한 작품(p.552, 해설)이라는 평가는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가 혼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집중하게 했다. “그의 읽기 어려운 산문시에 가까운 복잡한 문체 역시 난해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고 그의 주제 의식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p.549)”는 해설은 찾아내어야 할 것 또는 들어야 할 감추어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1833년 6월의 그 일요일 아침, 서트펜이 그 어디선가 말을 타고 이 거리에 처음 나타났고, (중략) 토지를 수탈해서(중략) 대저택을 짓고, (중략) 결혼해서 두 아이를 (중략) 얻었고, 그에게 할당된 생애를 비참하게(중략) 마쳤다.(p.15)” 작품 서두에 이미 스토리는 공개되었다. 비극임을 인치며 과거로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이야기는 이후 복잡한 곁길들을 탐색하며 종말을 향한다. 동일한 내용은 바로 앞 p.10에도 조금 변형된 문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길이를 달리하며, 꾸밈말이나 수식을 추가하며, 비장함을 더하거나 빼며 골자는 반복된다. 사건 자체를 끈질기게 반복할 때 가장 중심에는 서트펜 대령이 있다.
서트펜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악령 같은 운명을 지닌 자,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걸어 다니는 그림자(p.250), 또는 번거로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괄호를 여닫으며 병기하거나, 대화를 중단시켜 가면서 강조하는 “악귀”, “불한당 같은 악귀”다. 반면 로자는 “악귀는 아니었어. 악한이기는 했으나, (중략) 미치광이이기는 했지만, 광기는 역시 광기 그 자체의 피해자가 아닐까?(p.244)”라는 논리를 편다. 서트펜은 왜 악귀가 되었을까, 그는 누구일까를 추적하는 곁길들이 서트펜의 유일한 친구의 손자인 퀜틴 컴프슨을 비롯한 다른 화자들을 통한 사건의 묘사이자 해석으로 펼쳐지기에 단순하지 않다.
서트펜에게는 스스로 합리화시킨 ‘최고 선’인 ‘계획’이 있었다. 서트펜이 남부 요크나파토파 군, 제퍼슨 읍에서 요지부동 확고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면서 필요한 사회적 지위의 수단이었던 콜드필드 가문과 그 딸들, 처음에 앨런 그리고 후에 서트펜의 딸보다 어렸던 앨런의 동생 로자까지 비운으로 이끈다. “그래, 이 남부에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운명적인 저주가 내려졌던 거야.(p.28)”할 만큼 비극은 서트펜 얼굴을 한 아들, 헨리 서트펜과 성격과 정신을 물려받아 “서트펜계‘라 할 수 있는 딸 주디스 서트펜에게도 이어지고, 자신이 설정한 틀만이 기준인, 멈춰 돌아보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헤치고 질주하는 집착은 그가 손을 뻗은 대상들을 황폐케 한다.
이 집착이 질주하는 이유는 ”일을 서둘 필요성과 자기도 모르게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p.48)“, ”시간은 화살이다, 서둘러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마을을 지나 달리거나(p.51)“ 조급히 시간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서트펜이 더 이상 젊지 않은 시기가 오자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만은 아니었어. 문제는 오히려 그 시간의 부족을 깊이 파고 들어갔다는 데 있었어. 그는 시간 부족으로 인한 농축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어.(p.399)“ '한정된 시간'이라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조건을 초월할 수 없음에도 겸허함 대신 자만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본다.
‘계획’과 더불어 비극의 두 번재 축, 집착, 질주, 광기의 동기는 서트펜의 ‘순진함’이다. “서트펜은 순진한 것이 탈이었어. 갑자기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발견했어.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일을 해야만 된다는 것이었어.(p.319)” 인종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는 지점으로 “그는 나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그것을 말하지도 못했다고.(p.343)”이후 폭발 같은 각성과 가출은 ‘계획’을 발동시키는 시발점이 되고 순진함은 불타는 맹목에 기름을 붓는다.
비극의 와중에도 서트펜의 두 자녀에게 발견할 수 있는 아버지와는 다른 온기가 그나마 위안으로 남는다. 자기 방식의 속죄를 위해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헨리와 충격과 절망에도 손을 내밀고 챙겼던 주디스의 마지막 시간들도 여운이 남는다.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누가 압살롬인가?”, 또는 “왜 압살롬인가?”였다. 다윗과 압살롬을 서트펜과 찰스 본에 대입할 수는 절대로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름을 기다렸던, 이름이 불리기만을 바랬던,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했고 결국 다윗을 대적했던 압살롬은 일정 시기 또는 찰스 본 전 생애를 통한 정서의 간절함에서 겹쳐 보인다.
오만가지를 다 갖다 붙이는 듯한, 그 지리멸렬 중에도 톡 쏘는 악센트를 발산하는 만연체의 복문들, 안은문장과 안긴문장, 종속절의 릴레이, 부연에 부연을 쌓는 문장이 해설에서도 말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오르게 했다. 긴 근거 제시, 이유 설명과 설득 후에 단문으로 앞의 내용을 부정하고, 번복하는 이유를 다시 제시하기 시작하는 패턴의 문장들-그는 미친 사람이었어(p.242)~ , 그래, 그는 결코 미친 사람은 아니었어.(p.243)/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러나 나는 그를 용서했어.(p.249) 등-,도 독특하고 p.265 중반부터 p.270까지의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은 “백년의 고독”의 잊지 못할 장문이 연상된다.
대화의 질문 또는 시간적 배경을 기점으로 영화 장면 전환처럼 그 당시 상황으로 이동해버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문장들도 즐비하다. 표현의 탁월함을 놀라움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그녀는 하나의 변신-결혼 생활의 파탄 아니면 간통-에서 다음으로,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축적된 먼지 같은 세월과 나라는 거창한 자아를 짊어지고 옮겨 가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 누에고치에서 나온 나방처럼 과거를 일절 현재에 들여놓지 않고 현재를 일절 뒤에 남기지 않은 채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변화하여 가는, 만개한 장미나 목련이 금년 6월에서 내년 6월로 말없이 옮겨 가는 것처럼 완전한 모양으로 양순하게, 아무런 뼈대도, 실체도, 어떤 죽은 순수한 혼이 없는 풍성한 껍데기 먼지도, 아무것도 태양과 땅 사이 어느 곳에도 남기지 않고 다음 모습으로 변신하는 그런 여자였어.(p.287)”처럼.
같은 장면이 다시 그려질 때마다 중요한 요소, 결정적 단서가 돌연 추가되어 인물의 감정에 확 공감하며 빨려 들게 되는데 찰스 본의 주검 앞에서 주디스는 왜 눈물 한 방울 조차 흘리지 않았을까의 의문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풀리는 점도 그렇다. 그때까지 짐작했던 나름의 추측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으며 이후 주디스의 행동, 그녀가 살아낸 삶과 맞이한 죽음까지도 파노라마처럼 재생케 한다.
“압살롬, 압살롬!”은 눈에 비치는 활자를 읽어나가는 책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숙고해야 하는, 정지에 정지를 거듭해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 흑백 인종 차별과 계급질서 문제, 만연한 남녀차별 등의 배경 읽기도 필요하다. 여러 목소리를 가져와 인간의 다양한 선택과 배척, 그로 인한 책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반면교사적 울림도 주는 다층적인 작품이라 생각된다. 초독의 아쉬운 점은 주 화자인 퀜틴 컴프슨을 중심으로 하는 포크너 논문을 봤을 때 퀜틴에 집중하지 못했던 점이다. 포크너의 첫 작품을 시작으로 다른 작품을 읽어나갈 때, 또 언젠가 다시 압살롬을 읽는다면 전혀 새롭게 다가오고, 이 아쉬움 또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서평 8년 차 시점>
“(중략) 복잡한 문체 역시 난해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고 그의 주제 의식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p.549)”
포크너도 도스토옙스키처럼 분량을 늘려 원고료를 더 받아야 했나 중얼중얼하며 읽어나갔다.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작가의 뜻을 존중해 그에 부응하고 싶지만 흠, 쉽지 않았다. 서평에서도 썼지만 ‘누가 압살롬인가?’, ‘왜 압살롬인가?’ 뇌리를 떠나지 않은 질문이다.
고심 끝에 논문을 검색하고 관련 도서를 찾게 했던 작품이며 ‘앞으로의 서평은 학술논문을 제2의 레퍼런스로 보태나가야 하나’싶은 분기점 역할을 했다.
설레는 미소를 지으며 키보드를 누르던, 첫 번째 서평 앞에 앉아 무심히 기뻐했던 8년 전의 나는 이제 에스프레소 같은 고민을 하며 각설탕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