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시대의 함께 읽기와 기억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읽었던 시기는 1986~1987년이었다. 작품에 따라 한 권에서 네 권의 분량이지만 문고판이었기에 완역은 아니었다. 당시에 완역인가 편역인가에 민감하지는 못했고 분량이 많아야 조금 더 안심하는 정도였다. 크기도 아담한 문고판일지언정 앞표지에 실린 명화도 소중했고 전작 읽기의 도전정신도 가열찼다. 그때는 물론 서평을 쓰지는 않았다. 발췌 독서노트가 대 여섯 권을 넘어가고 ‘이러다 책 다 베끼겠다’ 불안해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때(노트는 이사 중 분실되었다. 아주 박스채로!), 책에는 밑줄과 메모가 지금 보면 어리고 진지한 필체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겨울이 되면 도스토옙스키 계절병이 반복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나?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 시작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여러 핑계를 대며 미루다 재작년에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고 작년에 “도스토옙스키 한 달 읽기 챌린지”에 참여하게 되어 노문학자인 로쟈 이현우 선생님께 질의응답의 기회도 가지며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6주간 독파했다. 호사였다.
북카페에서>
리뷰 딜레마가 몹시 큰 작품입니다. 가슴에 돌덩이, 아니 바위 하나!!
그래도 생각할수록 머리가 마비되어 어제 오늘 붙들다 그냥 올렸네요.
나에겐 '수정 버튼'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하면서요!
50% 정도 담았나 싶은데, 그러나 로쟈 샘도 어느 글에서 너무 긴 리뷰는 옳지 않다 말씀하셨던 것 같고요.(핑계)
발췌는 차차 추가해서 넣으려는데 밑줄이 너무 많다 보니 눈이 핑핑 도네요!
쓰는 분도 있는데, 읽는 것도 어렵고 독후감도 어렵고, 나 너무 예의 없다, 나는 뭔가, 자괴감 자주 들죠...
스메르쟈코프도 다 건너뛰었네요. 그 인간에게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본심인 걸까요.
수정을 다짐하며~~!(20200611)
관심을 가지다 보면 서로 격려하며 함께 읽을 책 벗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응원에 힘입어 읽고 쓸 수 있었던 시간이 소중하다.
독후 문제, 가슴에 한 짐이 얹힌 기분이 엄습한다. 읽는 순간의 감흥을 조금씩 정리한 메모를 찾아보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서평 후 든 생각은 만족감보다는 마땅치 않다는 자각이다. 쓰고 싶은 것은 못 쓰고 지엽적인 것만 나열한 듯한 느낌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책을 ‘장악’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2 회독 서평과 3 회독 서평 사이 2020년 3월 10일과 2020년 6월 11일의 딱 세 달 사이의 변화는 생각보다 작지 않다.
“여기 적은 생각을 그런대로 맥락을 갖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가능하지가 않았다. 내게는 그럴 재능도 없거니와, 그 밖에도 많은 작가들이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발상만을 엮어서 실제로는 일부만 좋고 대부분은 그냥 하찮은 내용을 가지고 올바른 결론이라는 듯 완전성의 인상을 주는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오만함이라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p.72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안인희/김영사)
무려 헤르만 헤세가 내가 느꼈던 씁쓸함을 이렇게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니 경이로웠다. 1920년 ‘새전망’에 실린 「유럽의 몰락,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시작 부분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내가 제대로 취한 것이 맞는가 답하기 어렵다. 헤세의 서평집을 읽다 보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 과연 만져볼 수나 있으려나 마음은 더 급해진다.
그때 그 서평>
[서평]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백치』 열린책들/김근식 옮김
- 가장 약한 자의 벗, 고통을 지고 가는 어린양 미쉬낀 공작 (20201102)
도스또예프스끼의 『백치(열린책들/김근식옮김)』는 그의 5대 장편소설 중 하나로 『죄와 벌』 다음에 발표한 작품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창조한 인물 중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세 인물로 죄와 벌의 소냐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 그리고 바로 백치의 미쉬낀 공작을 드는데(죄와 벌2/p.450문학동네), 미쉬낀 공작이라고 확정하기 전 이름이 ‘그리스도 공작’이었다는 점에서도(p.946)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치료를 위해 후원자의 도움으로 스위스에 머물던 미쉬낀 공작이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들이 관계를 맺고 각자의 목적을 향해 움직일 때의 파장과 현상을 사건의 중심인물로서, 때론 관찰자이자 중재자로서 그려 보인다. 공작의 정체성이기도 한 육신의 병, 간질은 그의 약한 고리이지만 순수하고 선한 마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본능적 자기방어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조건 없는 헌신 앞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평안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낀다. 사랑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기에 미워지는 양가감정의 충돌을 경험한다.
뻬쩨르부르그 행 기차에서 세 사람은 우연히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공작은 스위스에서 간질 치료를 하던 중 후원자의 죽음으로 예빤친 장군의 아내이자 유일한 공작의 먼 친척 리자베따 쁘로코피예브나를 찾아보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는 중이고 빠르펜 로고진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에게 빠져 아버지의 돈을 탕진한 이유로 심기를 건드려 피신해 있다가 아버지 사망 소식에 유산 상속을 받기 위해,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자신의 이익을 쫓아 분주히 웃음 짓거나 등 돌리거나를 반복하는 레베제프까지 여행의 목적을 나누며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유일한 친척인 리자베따 쁘로코피예브나를 만난다는 목적을 위해 예빤친 장군의 집을 찾아간 미쉬낀 공작은 장군 부인과 그의 세 딸을 만나게 되고, 그 중 집안의 우상이라고도 할 만한 막내 아글라야는 매사에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관철시킴으로 미진함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성격이 눈에 띈다. 이볼긴 퇴역장군의 아들이자 예빤친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와도 첫 대면을 한다. 미쉬낀 공작은 지병의 잦은 발작으로 거의 완전히 백치가 되었으며(p.49) 사람들 또한 그를 으레 얕보지만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공작을 다른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아끼게 된다.
공작의 주변에는 불안요소가 끊임없이 출현한다. 전투적 행동력에 있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드미트리를 연상시키는 로고진은 집요한 열정, 강한 소유욕으로 대변되며 일면 ‘그루셴카-드미트리’구도를 ‘나스따시야-로고진’에게서 찾아보지만 그러기에 드미트리의 순수함과 밝음을 로고진에게서 발견하기 힘들다. 여인들에게서도 물론 간극이 크다. 로고진은 질투와 적개심에 사로잡혀 숨어 헤치려는 자다. 그에 머물지 않고 급기야 몸을 드러내 헤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절세미모는 자신에게 독이 된다. 처음 사진을 본 미쉬낀 공작의 “기가 막힌 미모군요! 이 여자의 운명이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p.81)라는 말이 복선처럼 깔린다. 장군 부인이 이런 얼굴을 좋아하느냐 공작에게 물었을 때 그는 좋아한다 답하며 “이 얼굴에는······많은 고뇌가 담겨 있어요······.”(p.129)라는 이유를 댄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드미트리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생각하며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했는데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권력 있는 양육자 또쯔끼에게 키워지고 상처받음으로 그를 비롯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 나아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것, 구원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그녀의 동력인 것 같다.
뻬쩨르부르크 도착 첫날 저녁,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에서 가브릴라와의 결혼 여부를 발표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양심에 반하는 자기만의 비밀을 돌아가며 털어놓는 프티죄 게임을 하는데 각각의 일화가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냄으로 악한 행위까지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프티죄 게임의 마지막 당사자로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결혼 여부를 발표한다. 나스따시야의 최선을 다한 총정리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오랜 고통을 드러내고 주변인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다. 10만 루블을 불구덩이에 던지며 가브릴라를 시험하는 장면도 놀랍다. 그녀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으로 안식을 얻지 못한다.
도스또예프스끼답게 등장하는 인물이 소모적으로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남녀 주인공 이외에도 가브릴라, 바르바라, 니콜라이 삼 남매, 니콜라이의 친구인 이뽈리트, 레베제프 등의 전형을 직접 분석한다. 특히 4부 1장의 “유형적인 면에서나 성격적인 면에서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라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p.707)로 시작하는 부분부터는 심리분석과 인간 전형을 설명하며 소설 속 캐릭터의 작법과 기능까지 강의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인상 깊었던 양파 한 뿌리나 천 조 킬로미터 에피소드처럼 독자를 집중시키는 삽화들도 곳곳에 등장한다.
총살형 직전 사면령 번복에 “정말이지,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p.42)라는 말로 작가의 경험을 작품 속에 각인하는데 이런 폭력이 그 순간 이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이라는 형벌일 수 있음을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 마리 이야기부터 레베제프가 대기근 시기에 식인을 했던 수도사와 양심의 문제, 이뽈리트의 ‘해명’과 왜곡된 감정, 종교적 논점들, ‘고도의 예술적 모조’ 임을 아직 모르고 매혹을 느꼈던 공작의 사교계 데뷔 장면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공작은 말한다. “나는 나무 옆을 지나가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뭘 보고 다니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 내가 모든 걸 표현해 낼 능력이 없음을 한탄할 따름입니다······(중략) 어린아이를 바라보세요,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세요. 풀잎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며 사랑하고 있는 눈을 바라보세요······.”(p.851)
나스따시야만큼 아름답지만 상처는 없는 아글라야, 그녀는 미쉬낀 공작과 미래를 함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전개가 시작된다.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의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공작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한 마디를 남긴다.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나스따시야는 반드시 죽었을 겁니다.”(p.896) 이 정도면 여기서부터는 순조로운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멈추지 않는다. 내가 오랜 시간 두려워했던 문학 속 장면은 『죄와 벌』의 노파 살해 장면이다. 라스꼴리니코프의 회상 속에서는 더 소름 끼치게 재현되었다. 그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무더운 백야의 뻬쩨르부르크, 밀실처럼 작은 방에서의 만져질 것 같은 현실적인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하지만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감정일 수는 없고 각 인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가며 허무함과 깊은 슬픔이 함께 차오른다.
“공작은 갑자기 깨달았다. 이 순간과 더불어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 왔고,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았으며, 반갑게 받아 쥔 이 카드가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p.937) 더 늦기 전에 내가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해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문장이다. 나스따시야에게 했듯이 로고진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는 미쉬낀 공작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적 결말 앞에서 ‘왜 인간은 고통받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맹목적 자학이라거나 원래 성격이 거칠었어 라거나 그만 좀 하지, 멈출 수 있었을 텐데, 너만 힘든 게 아니잖아 등의 대답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런 말은 고통을 보탤 뿐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어떻게든 결과를 감당하게 한다.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받은 상처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모든 비극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의 첫 단추, 그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만나게 되는 아픔을 떨치고 새로운 시간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절실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공작이라 명했던 미쉬낀 공작을 작가는 정성껏 그려낸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그리스도를 닮은 세 인물 알료샤와 소냐, 미쉬낀 공작을 불러내 보고 싶다. 알료샤와 소냐에게 엿보이는 내적 충만, 미래에 대한 기대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한다. 이에 반해 미쉬낀 공작은 가장 약한 자, 비난받는 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자신을 희생시킨다. 부활을 내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희생 그 자체로 사랑을 실현한다.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는 상처를 억제하는데 그리스도가 실패를 했듯이, 공작 역시도 실패작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자기에게 끌어들이려 하고 자신의 믿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이미지를 안겨 주고 있다.”(p.968) 책을 읽는 동안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고통받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에게, 약함이 악함의 겉모습을 취했을 때도 감추어진 본성에 초점을 맞췄던 미쉬낀 공작의 시선을 살필 수 있었고, 그가 관계 맺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지켜볼 수 있었기에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서평 8년 차 시점>
찾아보니 도스토옙스키 서평은 5대 소설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다른 출판사 번역본으로 두 편), 『죄와 벌』, 『미성년』, 『백치』, 『악령』과 그 밖에 『분신』, 『가난한 사람들』을 썼다. 도스토옙스키 챌린지 후 전작 읽기까지 이어 참여했는데 전체 작품을 읽지는 못하고 5대 소설과 위의 두 편을 읽고 썼다. 그중에서 한 편을 선택하느라 고심 끝에 자주 회자되고 더 많이 읽히는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을 제외하고 『백치』를 선택했다.
다음은 헤세의 서평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사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누구나 평생에 한 시간만이라도 모든 진실이 중단되고 새로운 진실이 나타나는 미쉬킨의 경계 영역에 서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평생에 단 한 번 한순간만이라도, 미쉬킨이 눈 밝아지는 순간에 경험하는, 도스토옙스키가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예언자의 눈길을 지니고 거기서 벗어난 그 몇 분과 같은, 그와 비슷한 것을 경험해봐야 할 것이다.”<비보스 보코>, 베른과 라이프치히, 1920년 1월(p.71 같은 책)
그와 같은 미쉬킨의 경계 영역에 서서 새로운 진실과 기쁘게 조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