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개월 넘게 내 뜰에 피어있다 이제 가기 시작한다. 생명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듯 만지면 아직 따습다. 아들이 어릴 적 고사리 손으로 옴짤거려 만들었던 그릇에 쫑쫑 담는다.
그래도 아주 가기 전, 너희가 머무는 동안은 내 식탁이 동양 물감, 모란 빛으로 잠시 물들겠다.
하루 지나자 생명의 물기가 차츰 빠져나가고 이파리도 여윈 몸으로 세상으로부터 돌아눕는다.물이 고픈 모습에 뒤늦은 줄 알면서도 담그어본다. 이 생명은 있는 것인지 간 것인지 헷갈린다. 부질없이 이승에 잡아 두는 것일까, 젖은 물 한 모금은. 마치 연명 치료처럼.
갈수록 종이꽃이 되어 떠 있다
사흘이 지나고 오늘은 스님이 오셨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럽다던 여승이 여기 계시구나. 얇은 사(紗) 고깔을 쓰고.
승무 (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가 고요히 나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과 긴 소매 그리고 외씨 보선에 가둔 뜨거운 젊음이 얼마나 번뇌이겠는가. 그 별빛도 찬란히 지려한다.
춤이 멎고 합장. 그들과 함께 하시려 이 뜰에 발목을 담그신다.
따스함이 간다.
늦여름 9월부터 한겨울에 이르는 사 개월여는 긴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무슨 소명인지, 까무룩 하는 한순간 그는 갈지, 어느 순간이 그 순간일지. 생은 잔치를 춤으로 추어 보이고 사뿐 가는 것인지. 늙어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오지 않은 죽음을 이들과 함께 미리 산다.
낙화가 가고
텅 빈 꽃 터를 보다 깜짝 놀랬다.
가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네.
오는 것도 있다. 가야지만 온다.
나 몰래 빼꼼히 새 꽃대가 솟는다.
이들과
다시 살기로 하겠다.
연두(軟豆)하게,
연두연두(年頭軟豆)하게.
맹렬히 초록으로 치닫을 연정.
지나간 꽃대를 싹둑 자른다.
새해다.
지난 꽃대는 너무 바트게 자르면 안 된다고 한다. 마디와 마디 사이에 삼사 센티쯤 여유 두고 자른다.
*나빌레라:
'나비(명사)+이-(서술격 조사)+-ㄹ레라(종결 어미)'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ㄹ레라'는 해라할 자리에 쓰여, 추측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 ‘-겠더라’에서 ‘-더-’의 의미가 약해진 것으로서 주로 옛 말투의 시문에서 쓰입니다.
ㅡ국립국어원
그러니까 이 말은 '나비이겠구나. 나비와 같구나.' 정도이겠습니다. 저는 '누비다'의 방언 '나비다'도 떠올라요. '이리저리 거리낌 없이 다니다. '
고깔은 고이 접은 나비 같은데요, 승무의 긴 소맷자락이 허공을 가벼이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가르는 힘도 연상되어요. 그래서 승무가 나비는 것 같아요. 이승의 허공을. 결코 연약하지 않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