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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Apr 18. 2024

병실에 오지 않는 방법

'게으름에 대한 찬양'_버트런드 러셀

병실 밖으로 봄이 한창이다.  거동할  없는 이 상태가 얼마나 갈까.  허리를 곧추 세우고 뚜벅뚜벅 걸을 수 있다는 건  삶도 한창이라 했던 것일까.


일을 맡으면 기준을 채워하는 것에 속박된다. 그러다 몸이 상한다. 결국 어느 한 곳이 망가져야 강제로 휴식하는 지경이 되고 그 틈에 찔끔 쉰다. 에라, 모르겠다. ㅡ병동은 잊어버릴 자유, 그희디희다는  듯  벽도 천정도 침상도 다 새하얀 내뱉어 보지만 뒷 일까지 다 그놓아야 직성이 풀리니 결국  발 뻗어 쉴 만한 틈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아프곤 한다.


어느 틈에 봄이 여기저기 분홍 망울로 팡실팡실 터진다. 동안 뭘 한다고 봄도 없었던 지.




일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거창하게 말해 현대인에게 무엇인가. 자아실현이라는 우아하고도 고전적인 답이 있다만 냉정히  '생계형 직장인'인 나는 저질러 놓은 대출의 짐더미가 아니라면  덜 먹고 덜 쓰면서 이러한 유형 따위를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다. 강제 휴식을 하는 이 시간도 눈치코치로 부담인 나를 보면 더더욱.


자아 효능감?

내 일로 내 쓸모를 사회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만 덜 초라하다고 느낀다면 그 판단의 점은  외적 시선이다.  한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무해한 나로 떳떳함을, 오롯이 내적 시선으로  나를 이렇게 보기 시작했을 때  며칠 간의 무기력이 서서히 아졌다. 직장일이라는 사회적 구조 속의 내가 아니라도 괜찮다고. 이쯤 오면 '그만둘까, 이제'라는 생각이 들어 차기 시작한다.


격무에 시달리다  형해와 같이 형식만 남는다. 애초에 다짐하던 의미 나부랭이는  사라지고 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탓하게 되지. 체력 또는 능력, 혹은 인내력 운운는 한계.




읽을거리  가지를 남편에게 부탁해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이 책 생각이 나서 찾아오랬더니 당장 병실로 가져다준다. 제목만으로도 위안이 되던 책. 강제로 게을러져야 하는 이곳에서 비로소 읽어 본다. 지 그림 여인의 낭창하고도 여유로운 포즈는  노동의 긴장으로 뻣뻣한 우리네와 참 대조이다. 자본주의 성장의 땔감이었던 '근로'에 대한 신화를 1930년대에 이미 비판한 러셀이 대단하다. 유토피아인들의  6시간 노동과 그 외 여가 생활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어느 경제학자의 444법칙, 그러니까 4시간은 생계를 위한 근로, 4시간은 성장을 위한 공부, 4시간은 친교와 소통의 시간. 이 법칙을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설레었던가. 물론 이 4는 러셀에서 기반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하루 일하고 하루는 쉰다고 말하던 말레콘 해변의  느긋한 쿠바 사람들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P.18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윤리는 지배의 비용을 줄게 했다는 그의 말에 고개 끄덕여진다.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이다.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본분'  즉 '의무'이므로  '사람은 그가 생산한 것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미덕에 비례해 임금을 받아야' 한다.  때문 여가는 분배되지 않는다. 그것이 '일의 풍속'이다. 그래서 생산성 발달 8시간 노동으로 두 배의 물건을 생산해도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지 않는 것이구나. 모두가 4시간씩 일했을 때 나올 여가는 창출되었으나 결론은 실업이란 고통의 '여가'가 된다. 과잉 생산되어 파산 업체가 나오더라도 '풍속'은 유지되어야 하기에.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다. 여기서 '풍속'말은 정치적 함의 들린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무용한 지식, 정신적 쾌감, 사색하는 습관 '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익 행위' 외에는 모든 것이 죽어 버린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러한 사회 병리를 회복하게 하는 개념이 아닌가 한다. 그는 사람들이 부만을 추구하는 바탕에는 공포가 있다고 다. 안전에 대한 공포. 자기 삶이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내 노후를 누구도 책임 주지 않을 거라는 공포...

100년이 흘러도 러셀의 목소리가 유효한  세상을 보 직장에서 119에 실려와 병상에 누운 내가 더 처연해진다.





올해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병실에 와서야 봄이 한창인가 했더니 어느새 벚꽃의 연분홍 치맛자락도 사라지고 말았네. 유토피아란 그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이라지만 이 시대 한 직장인은 오늘도 꿈꾼다. 참다운 게으름을 찬양할 수 있는 사회를. 너무 먼 곳을 그리워하는 티켓인지는 모르나 며칠 전 내가 던진 한 표가 '노동의 현명한 재구성'에 다가가는 작은 봄, 그러니까 꽃잎 한 장될 수 있다 올해 내게 무참했던 봄도 이제 그만 놓아줄 수 있으려나.






ㅡ'게으름에 대한 찬양' 출판사의 책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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