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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Oct 29. 2024

서랍에 넣어 둔 한강을 꺼내어

한강의 수상 소식에 나는 우울했다. 물론 감격스러움과 함께.


우스운 것내가 그와 같이 '작가'라는 일군의 반열에 있으므로 질투한다든가 하는 처지도 아닌데 왜 런 생각이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무얼 했지, 그동안 난.


그의  '서시'를 읽고 나는 처음으로 내 운명이 사랑스러웠었다. 내 것이어서 고맙다고 내 운명에게 말했었다. 그 힘이 무엇일까 스스로 잠깐 물어보았지만 바쁘게 사는 와중에 그것은 좋은 작품에 으레 품어보는 질문 하나쯤으로 변되어 있었다. 언제 한 번 가만 앉아서 그가 는 언어의 건반 소리를 유심히 들어야겠다는 기약만 하면서. 노벨상 수상 이후 첫 발표된 산문에 '유난히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심장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표현이 있었다. 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치환하는 놀이를 하면서 혼자 뒤늦은 변죽을 울다. '유난한 품은 고통 속에서도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의미 밝혀 준다'라고.




한강은 나와 거의 동년배 여성이다. 우리는 정치, 사회, 문화적 토양을 많이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청춘 이후로 서른 해 가량을 지나오면서 누군가는 성을 확고하게 쌓았 누군가 신념은 헐벗어 흩어졌다.  싫은 저녁 설거지 앞에 서거나 혹은 가까스로 남은 일요일의 부스러기에 쓴 맛을 느끼다가 생각하곤 한다. 나는 이제 세상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생명의 의무감이 오늘은 피곤하다.  '비교'보다 '고유성'는, 존재에 대한  시대의  수학의 정석처럼 교과서일 뿐인 것 같다. 누군가는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고 누군가는 속된 삶을 사는가.




국제영화제가 끝난 전당에는 어느덧 중남미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토요일 출장을 마치고 차 한 잔쯤 후 볼 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 어머니와의 고된 여정을 담았다는 una madre를 예했다. 짤막한 소개글과 남미 사람 특유의 깊은 속눈썹을 가진 배우의 스틸 컷을 보면서 의문을 갖는다. 극 중 어머니를 왜 '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칭했을까. 여전히 내겐 어려운 '어머니'란 단어다.



예상대로 영화는 고통스러웠고 자궁 속으로 회기 하는 상징적인 엔딩 장면은 그것을 증폭시켰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들. 엄마, 정말 사랑해요. 저 폭력을 다 견뎠으므로 어머니는 아름다웠다고 했구나. 아들은 미친 엄마를 사랑했지만 미래는 없었다. 물거품이 그칠 때까지 인물의 고통이  폐부도 긁어 내린다. 극장은 영원이었을 저들 단말마의 시간 앞에 우리를 앉혀두고 침묵한다.


인간 고통의 몸서리를 건네받고 극장 밖으로 현실의 발자국을 뗀다. 인간의 험한 인식이 양산하는 희생은 분노스럽다 못해 허망하다. 시대에 내 인식의 좌표는 어디쯤인가. 눈길 떨어뜨려 발아래 내가 선 자리를 살핀다면 영화는 성공한 것일까.




밤새 복부가 아프고 혈뇨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일어나 내일 직장은 어쩌나 걱정하다가 무슨 직장 따위지 지금, 싶어 진다. 보일러를 틀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의 온기 속으로 떨리는 몸을  넣는다. 온도는 피부를 열고 서서히 몸을 데운다. 한 몸 따스하게 안아 주는 공간이 고마워진다. 열심히 벌던 나날이 은 아니었네. 잠을 자야 하는데. 아침이 오면 병원엘 가야지. 눈을 붙이려 하지만 잘 수가 없다. 피떡 같은 혈뇨가 비치고 통증이 심해지자 택시를 야 했다.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 줄 몰랐다. 다행히 추위는 생각보다 덜했고 기사는 친절했다. 새벽의 푸른 응급실이다. 진통제가 들어가고 바닷속 물고기 듯 잠이 들었다. 피 생각이 났다. 폐경 이후 볼 수 없던 낯선 피. 지독한 생리통을 하던 소녀 시절 낭자한 생리혈은 삶의 고통이 내게 던지는 같았다. 너 어디 한 번 나를 이겨 봐. 피의 비린내 섞인 말. 여자의 혹은 어머니의 숙명을 넘어 태초의 고통이 가진 선연함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핏덩이에 움찔하면서도 눈날을 세워 노려보 했다. 학 1학년 때던가.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처지라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과외 수업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지만 리통을 못 견디고 다시 그 집 문을 두드려야 했었다. 정신을 잃고 한참을 잤던 것 같다. 사모님이 끓여놓은 전복죽이 단아한 도기에 담겨 다. 그녀의 품위도 함께 소반에 내려앉아 있다. 부잣집의 아득하고 감미로운 냄새 저 꼬수운 죽에서 비롯된 건가, 나는 피에 진 것인가 이긴 것인가. 여태껏 그때의 미각은 뇌리에 없고 후각 그리고 승부를 따지던 문장만이 남아 있다.


사람이 간사하다. 아프지 않고 건강 때에는 생각지 못하던 것을 이렇게 체감하니까. 그때가 얼마나 고마웠나를.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 이 아픔이 간다면'. 낯 뜨거운 거래 납작 엎드려 하고 싶어지는 때가 이런 니까. 견디기 어렵게 통증이 더해 갈 무렵 응어리진 피를 본다. 생산을 멈춘 몸의 피는 메마르고 까칠한 것 같다. 이제 저 피는 몸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새된 고함소리라도 되는 것만 같다. 그래, 나도 살려고 발버둥 쳐 왔구나.





언젠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 했 말을 여섯 살 즈음 우연히 들었다. 이런 것이 고독이라는 것을, 손아귀에서 구슬을 굴리듯 그것을 나는 평생 쥐고 굴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고독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떻게 되었을까. 시대는 불우했지만 나는 사랑에 목말랐고 안이한 삶을 택했다. 정의의 쓴 맛은 그야말로 맛만 보고 뱉었다. 안락은 감미로웠고 대신 그에 따르는 일말의 부끄러움을 오래도록 달고 사는 사람이 되었. 그리고 진부한 표현이다만 어느새 얼마나 남나 주판알을 굴리는 데 심혈인 거야. 그런데 그런 나도 살려고 발버둥 쳐 왔다잖아, 저 피가. 그 분투가 생각 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그것뿐이라는 듯, 그것이 속죄라는 듯 종이 귀퉁이 한 줄라도 아이들에게 남기려고 했어. 글이란 글은 모두 험 지문에 불과할 숙명들이었지만 그들의 조합을 온통 잘근잘근 . 그러면 우리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 한마디 건져 내었지.  말을 타이프해 넣곤 했어. 국어 수업 유인물 귀퉁이에. 감히. 감히 그런 말들을 했어, 내가.




노트북을 열었다. 별다른 수도 없으면서 쓰고 싶어 진다. 어제 내린 비로 가을이 맑다. 오늘에사 진정 가을인가 싶게. 비가 오고 날이 맑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아침 출근길 정류장에서 소박한 한 여성 시민이 책을 읽으며 버스를 기리고 있다. 나를 비스듬히 등진 그녀의 책은 표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지 모서리로 드문드문 검은 테두리와 흰 점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소년이 온다'라는 걸 대번에  수 있었다. 노벨상의 효과는 어마어마하구나. 도시 끝 작은 마을의 버스 정류장 풍경도 책이 점점이 피어나게 만드는구나, 미소 지었다.


밤이  나는 랍에 넣어 둔 한강의 '서시'내었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이 위대한 작품을 쓸 동안 나는 내 삶을 살았다. 끔 느끼기도 했던 운명이었다. 그가 늘밤 찾아와 동안 자기가 맘에 들었냐고 묻는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모두를 알고 있을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는다. 그 얼굴의 능선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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