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연지 석 달이 조금 지났다. 나는 '잊혀질 권리'론자라고 늘 생각했다. 디지털 상에 영원히 기록된다는 게 두렵고 내 삶을 누군가가 본다는 거도 싫었다. '내 죽을 땐 폭파하고 간다.' 하고 시작한 블로그다.
아직도 블로그를 연 구체적인 동기는 모르겠다. 일기든 메모든 늘 끄적거리긴 하는데, 그것을 아날로그로 보관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난 것을 들춰 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일까. 그런 나인 걸 알기에 결혼식 일주일 전, 지난 일기장을 미련 없이 태웠던 기억이 있다. 이러다가 또 그간의 일기장을 태우는 장면을 분명 또 보게 될 것이다.
블로그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그냥 기록하고 싶었다. 며칠 지나니 헤시 태그에 주목하게 됐고 사람들이 구경 오면 좋겠단 생각도 슬슬 들기 시작했다. 풍경이 지기 전에 알려야 할 텐데, 장엄한 의무감으로 실시간 여행지 정보를 올리기도 하더군. 내 뭥미. 보러 오는 사람도 없는데.
이웃님들을 사귀게 되었다.
각자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콘텐츠는. 뭐 딱히.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쓴다. 시 생각나면 시 전달, 그림 그리고 나면 그림 소회, 생활을 발견하고 '오홋!' 한 순간의 이야기, 미니멀라이프 한다 해놓고 실패담을 더 쓰고 있는 잡문 나부랭이 등등. 그래도 정직하게 쓰려고 하는 원칙은 꼭 지키려 한다. 더 잘난 척하는 글은 밑천이 곧 드러난다고 믿는다. 뻐기다 초라해지기보다 있는 대로에 당당한 게 백 배 낫다.
글을 잘 쓰시고 삶이 아름답다, 반한다. 글이 깨끗하시다, 사무사(思無邪), 삶이 깨끗하시다, 더더 반한다. 낚아챌 듯 숨도 못 쉬게 글을 잘 쓴다, 삶이 없다, 패스.
글 몇 개뿐인데 구독자가 엄청나다. 너무 멋져서거나, 블로그 확장 기술을 알고 있는 것이거나. 후자의 경우는 저어 된다. 십여 년 넘게 차곡차곡해오신 분도 많다. 그런 분들은 어김없이 크다. 주제넘지만 내 나름대로 블로거를 이렇게 가늠하곤 한다.
연배를 막론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선하고 깊이 있는 분들. 사는 모습이 너무 좋은 이웃들의 글이 올라오면 즐겁다. 이렇게 이웃님들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한편, 나는 왜 이렇게 써대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 답을 찾고야 말리라 이빨을 간 적도 있다. 인간에겐 글쓰기 본능이란 것이 있는 것도 같다. 호모 라이트니쿠스란 말은 어데 없나 정도랄까. 그렇지만 글을 잘 써보겠다고 글쓰기에 대한 책을 보는 건 무척 싫어한다. 그냥 쓰면 되지, 뭘 유난인지.
노력해서 개인 출판이라도 하면 좋지 않냐고? 직장에서 만난 번아웃 이후, 내 신조는 바뀌었다.
'진주조개의 뼈 깎는 노력, 그러다 죽는다.'
나는 글을 즐기고 싶다.
뭔지 할 말이 있는 거는 같다.
내 할 말의 수다를 입으로 떨었다면 나는 천하의 방정맞은 나불이가 됐을 것이다. 다행히 글로 말하니 체면은 덜 죽는다. 글은 뜸 들이는 시간이 지나야만 읽는 이의 상에 오르기 때문이다.
'세상 심드렁하던 내가 글을 쓰고 있으면 꼬물꼬물 살아 있는 거 같다.' 요건 좀 말 그대로 꼬물이 같은 표현이고 '만년필을 들고 노트를 펼치면 우주를 유영하는 것만 같다.' 이건 부풀려 느끼하다. 결론은, 쓸 때 나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알맞고 마땅하게 쓸 때.
어쨌든 지금은 누가 보든 말든 이렇게 쓰고 있는데, 나 혼자야 괜찮지만 읽어 주는 사람 편을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걸 써서 보이는 게 맞는 건가 의심이 나고 그러다 보면 그만 풀이 죽는다. 발 빠르고 가치 있는 정보를 주나, 심미한 예술을 보이나, 일상이랄 거도 거기서 거기... .
블로그 열고난 후 석 달여. 생각이 여기까지 온 셈이다. 하기야 곧 복직하면 매일의 글 수다도 이젠 안녕해야 할 것이다.
며칠 전부터 십 년도 더 전에 읽어서 감감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찾는다. 쓰기에 대한 것은 한 꼭지였던 거 같은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웰의 이력이 있으니 현실 참여적인 글이었던 거 같다만...어딨지. 뒤죽박죽 된 책장을 보니 한숨만. 그래도 찾아봐야지.
그러고 보니 이런 책들도 꽂혀 있네.
'글쓰기의 최전선',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
취향 아닌 책들을 왜 저리 사두었을까. 빳빳한 책등이 무안하다.
그냥 쓰다가, 왜 쓰는지 고민하다가, 어떻게 쓸지 하다가, 뭘 쓰는 게 맞는 건가 하다가... 끝없는 질문에 던져지게 되는 걸까.